여름이 가까워지고 있다. 연두로 빛나던 신록은 짙은 초록색으로 바뀌며 더운 날씨와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맘때면 대학 때 답사를 준비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여름방학은 가을 정기답사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지역은 정해져 있는 편이라 그 안에서 답사 갈 장소와 주제를 선정했다. 그럴 때 조금 어렵던 지역이 경기도다. 서울의 서남쪽은 교통이 복잡해 버스 이동 동선이나 시간을 잡기 어려웠고 동북쪽은 도로 상황이나 행정적인 제약이 많았다. 무엇보다 민통선, 곧 DMZ 접경지역으로 들어가려면 절차도 복잡하고, 왠지 긴장감이 느껴져서 조심스러웠다. 그런 곳 가운데 하나가 연천이었다. 실제로 답사 도중 곳곳에서 만난 군부대와 군인들의 모습은 여전히 한반도가 긴장 상태에 있음을 확인시켜줬다.
사람 손 덜 탄 수려한 자연
답사를 다녀온 뒤 다시 가고 싶은 지역으로 손꼽는 곳도 연천이었다. 전곡리 선사시대 유적을 포함해 여러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과 유물이 많기도 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놀랐기 때문이다. 사람의 활동에 제약이 있었던 만큼 편안하고 사람의 손을 덜 탄 느낌이었다. 물론 지금의 연천은 그때 분위기와 많이 달라졌다. 20여 년 전, 출입하는 사람의 신분증을 검사하던 초소는 일찌감치 사라졌고 예전에는 아예 가볼 수 없던 곳도 이제는 많이 개방됐다. 또 몇 개의 임시 전시 공간으로 사람을 맞이하던 전곡리 구석기 유적엔 유려한 우주선의 모습을 닮은 박물관이 들어섰다. 그래도 무언가, 연천만이 주는 느낌은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DMZ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 많아서일까. 그래서 조금은 한적하게 답사를 할 수 있는 연천의 역사 유적 몇 곳을 살펴본다.
본격적인 연천 답사에 앞서 먼저 DMZ와 휴전선(군사분계선)의 의미를 잠시 살펴보자. 외국인과 함께 이 지역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외국인에게 군사분계선과 38선을 구분해 설명하느라 시간을 썼던 기억이 난다. 한반도 현대사에 익숙하지 않으면 이 두 용어가 헷갈리는 모양이다. 사실 38선은 ‘북위 38도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광복 이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할 때 편의적으로 나눈 선이다. 그렇지만 남과 북에서 각각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고 그 영향 속에서 남과 북에 정부가 들어서며 마치 국경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것만으로도 비극인데 더 일이 일어났으니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다.
3년간의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많은 상처를 남긴 채 정전에 들어갔다. 이때 남과 북의 경계로 정한 선이 지금의 휴전선 또는 군사분계선이다. 군사분계선의 표시는 200m 간격을 두고 세운 1292개의 표지판으로 북쪽을 향한 것은 한글과 영어, 남쪽을 향한 것은 한글과 한자로 표기돼 있다. 그런데 정전을 유지하고 남과 북의 우발적인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해 비무장지대를 만들었으니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 각 2㎞에 들어오지 않기로 협정을 맺은 것이다. 당시 보통의 총과 포의 사거리를 염두에 둔 거리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보통 우리가 사진이나 매체를 통해 보는 철책선은 휴전선이 아니라 비무장지대의 남쪽 경계, 곧 남방한계선이다.
전쟁의 흔적이 주는 긴장감
이렇게 설정된 지역이 비무장지대, 곧 DMZ다. 처음 설치할 때는 그 면적이 약 900㎢ 정도였지만 남과 북이 그 영역을 잠식해 지금은 약 570㎢로 줄었다. 그리고 DMZ를 설치할 당시 남쪽 10km 정도를 민간인통제선, 다시 그 남쪽에 접경지역이라고 해서 일정한 제약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 접경지역과 민간인통제선이 없어지거나 축소되고 있다.
이 DMZ, 그리고 민간인통제선 일부가 연천을 지난다. 지금은 많이 완화됐다고 하지만 DMZ 인근의 역사 유적을 살펴볼 때 약간의 긴장감이 드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현실, 혹은 풀어가야 할 숙제라는 점에서 연천 답사는 역사 유적 외에도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이런 생각에 도움을 줄 만한 유적이 바로 고랑포구 역사공원, 호로고루성, 그리고 경순왕릉이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에는 조금 익숙한 지명이 있다. 바로 ‘고랑포’다. 1960년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그 배경에는 바로 ‘땅굴’과 ‘간첩’이 있다. 제1땅굴이 발견된 곳으로 1968년,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한 북한의 124군 부대 소속 31명의 특수부대 요원이 이 고랑포를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이 밝혀졌다. 곧 ‘1·21사태’가 시작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고랑포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고랑포구’다. 임진강에서 배가 닿는 여러 포구 가운데 하나다. 조운선이 드나들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었다. 임진강의 수심이 얕아지고 주변 지형이 험해지기 때문이다. 이 포구의 동쪽, 곧 상류는 걸어서 건널 정도의 얕은 여울이 있어서 임진강을 건너려면 이 장소를 선택하게 된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1사단이 고랑포 일대를 통해 남침했다.
포탄 사이로 물자 나른 군마 '아침해'
여기에 한국전쟁과 관련된 역사공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공원 마당에는 군인이 아닌 ‘말 조각’이 세워져 있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말의 동상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말 동상을 세워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동상의 주인공, 말의 이름은 영어로 레클리스(reckless)이며 한국 이름으로는 아침해다. 이 말은 미 해병대의 실제 계급을 갖고 있다. 연천 지역 전투에서 활약한 뒤 받았다. 1953년 3월, 이 지역을 지키던 미 해병 1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에 직면했다. 고지를 지키던 미 해병대는 유리한 위치였지만, 고지전의 특성상 적과 맞서는 군인들에게 계속해서 무기를 공급해야 했다. 그런데 보급기지와 전쟁터가 애매하게 떨어져 있고, 적의 공격이 격심해 사람이 나르기도, 차량으로 옮기기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이 부대의 에릭 패터슨은 군수품 보급에 말을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서 당시 ‘아침해’로 불리던 말 한 마리를 사 왔다.
패터슨의 결정에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겁이 많은 말의 특성, 그리고 전마(戰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아침해는 임무를 완벽히 수행했다. 5일 동안, 51번에 걸쳐 포탄을 나른 것이다. 레클리스는 길을 거의 외워서 다녔으며 포탄이 떨어지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을 본 미 해병들은 ‘무모함’을 뜻하는 ‘레클리스’란 이름을 지어줬다. 임무 수행 과정에서 레클리스가 작은 부상을 입자, 병사들은 자신이 입고 있던 방탄조끼를 벗어서 덮어주기도 했다. 결국 미 해병은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레클리스는 이 부대를 상징하는 존재가 됐다. 1954년, 미 해병 1사단이 귀국할 때 레클리스도 같이 귀국했는데 이때 레클리스는 이미 병장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미국으로 간 레클리스는 1959년 훈장과 함께 하사로 특진하고, 1960년 전역하며 군마에서 벗어났다. 1968년, 레클리스가 죽자 미 해병대는 레클리스의 동상과 기념관을 만들었다. 그 동상을 다시 여기 고랑포구 역사공원에 재현해 놓은 것이다. 한 마리 말에 대한 이야기지만, 당시 연천에서 벌어진 전투의 치열함과 말에 감정이입 했던 병사들의 절실함이 함께 느껴진다.
삼국의 길목 지킨 '호로고루성'
이제 시선을 조금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 고랑포구 역사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호로고루성’이 있다. 이 성은 삼국시대,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고구려가 쌓은 성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근처의 임진강은 걸어서 건널 수 있어 남과 북을 잇는 길목이었다. 그런 전략적 중요함을 염두에 두고 고구려가 쌓은 성이다. 처음 이 지역을 차지했던 것은 백제인데, 지금 호로고루성은 그 백제를 밀어낸 고구려가 쌓았다. 그리고 이 지역을 마지막으로 차지한 것은 신라였으니 하나의 공간에 쌓인 역사는 이렇게 서로 다른 나라의 켜를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천여 년, 이 지역은 전방에 속하는 곳이 아니었으니 그 전략적 가치는 낮아졌고 그 기억도 사라졌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찾아낸 호로고루성은 다시 전쟁의 기억을 소환한다. 삼국시대 세 나라가 마주하던 국경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 남과 북이 경계하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런 이유로 호로고루성의 아름다운 풍광보다는 임진강의 전략적 가치, 성곽의 효용성과 전쟁의 긴장이 느껴진다. 사실, 이 성은 고구려 기와 박물관으로 부를 정도로 많은 기와 관련 유물이 발견됐으며 이 지역의 현무암으로 쌓은 유려한 모습을 자랑하는 역사 유적이다. 검은빛이 도는 성벽은 단단하고 강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 드문 고구려의 귀한 유적 가운데 하나다.
삼국 경쟁의 최종승자는 신라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호로고루성 바로 옆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무덤이 있다. 신라는 삼국시대 전쟁에서는 승자였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 위치가 달라졌다. 천년 왕국 신라는 그 역사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새롭게 자신의 품에서 태어난 신생국가, 고려에 항복한 것이다. 그래서 신라의 경순왕은 자신의 마지막 생을 신라 도읍지가 아닌 고려의 도읍지 개성에서 마쳐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 무덤이 남았으니 신라 57명의 왕 가운데 경주 일대를 벗어나 묻힌 유일한 왕이 됐다.
이런 이유로 연천에서 신라의 승리를 얘기하는 게 어색하다. 다만, 신라의 항복은 다시 평화를 가져왔으니 고려, 그리고 조선으로 이어지는 시간 동안 임진강, 연천 일대는 평범한 삶의 터전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한국전쟁의 긴장감이 남아있는 이곳을 살펴보는 우리에게 고민해야 할 숙제가 있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경순왕의 항복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있지만 치열한 후삼국의 전쟁이 끝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경순왕과 경순왕릉을 가볍게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평화를 먼저 생각한다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