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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말의 원뜻이 있었던 자리

01 주변 사람들에게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란 말을 어떤 뜻으로 이해하는지 물어보라. 어휘력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열에 일곱 여덟은 “그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얻어먹고 얻어 자며, 남의 신세 지는 거 아닙니까?”라고 할 것이다. 맞다. 국어사전에도 ‘동쪽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서쪽 집에서 잠을 잔다는 뜻으로,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냄 또는 그런 사람을 이르는 말’로 풀이되어 있다. 요컨대 일정한 삶의 근거지도 없이 돌아다니며 남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의 행태를 일컬을 때 이 말을 관용구처럼 쓴다. 구차하고 궁색 맞고 좀 쓸쓸하고 처량해진 사람의 신세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생겨날 때의 원뜻은 이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동가식서가숙’이란 말은 중국 북송 초기의 학자 이방(李昉) 등이 977~983년 사이에 편찬한 <태평어람(太平御覽)>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이런 부류의 책을 중국에서는 일찍이 <유서(類書)>라고 불렀는데,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백과사전과도 같은 책이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옛날 제(齊)나라에 혼기가 찬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마침 두 집에서 청혼이 들어왔는데 동쪽 집의 아들은 못생겼으나 부자였고, 서쪽 집 아들은 인물은 좋았지만 집이 가난했다. 부모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 딸에게 한쪽 소매를 걷어 의사를 표시하도록 했다(동쪽 집 아들이 좋으면 오른쪽 소매를 걷고, 서쪽 집 아들이 좋으면 왼쪽 소매를 걷으라 했다). 딸은 즉시 두 소매를 다 걷었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딸이 대답했다. “음식은 동쪽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자려고요.”(齊人有女, 二家同往求之. 東家子醜而富, 西家子好而貧. 父母不能決, 使其女偏袒示意. 女便兩袒. 母問其故, 答曰, 欲東家食而西家宿.) <고금담개(古今譚槪)>

 

이야기가 주는 의미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동가식서가숙’의 뜻과는 사뭇 다르다. 이 이야기로 본다면 ‘동가식서가숙’의 원뜻은 이익에 민감하고 매우 이기적인 행위(사람)를 가리키는 데에 가깝다. 딱하고 처량한 처지를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괘씸한 느낌을 준다.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으로서 배우자에 대한 신의 같은 것은 간 데도 없다. 맛있는 걸 먹을 때는 부잣집 신랑과 지내고, 잠을 잘 때는 잘생긴 신랑에게 간다니, 그래서 ‘동가식서가숙’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그러면 말의 뜻이 왜 이렇게 변해 왔는가. 아마도 이 말을 사용하는 맥락이 다양해짐에 따라, 원래 그 말이 생겨난 맥락에서 쓰여 오던 말뜻은 점점 쇠퇴하고, 새로 생겨난 또 다른 어떤 맥락에서 쓰는 뜻이 점점 세력을 얻는 양상이 되었으리라. 이를테면 이익에 따라 그때그때 기민하게 움직이는 행위를 뜻하던 ‘동가식서가숙’의 의미기능은 새로 생겨난 다른 말이 감당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 이 말도 새로운 역할을 찾아 다른 의미기능을 감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즉 ‘오갈 데 없어서 남의 신세에 기대어 사는 궁색한 형편이나 사람’을 뜻하는 쪽으로 의미가 옮겨 오게 되었을 것이다.

 

 

02 무엇이 그렇게 되도록 작용했을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태의 변화, 그 생태가 빚어내는 문화, 그 문화가 지배하는 사람들의 의식 등이 긴 시간을 두고 언어에 작용한 것이리라. ‘오빠’라는 말도 그렇게 변했다.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남매 사이에서 여동생이 손위의 남자를 부르던 호칭으로 쓰던 것이 ‘오빠’의 원뜻이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변했는가. 이성애로서 사랑하는 남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이제는 거의 일반화되었다. ‘오빠’라는 말의 사용 맥락이 달라짐에 따라 의미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실제로 핵가족제도와 소수 자녀의 가정이 되면서 집안에서 남매를 이루는 ‘오빠’는 많이 사라져버렸다. 집 밖의 ‘오빠’를 찾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변한 ‘오빠’의 의미도 영구히 고정불변으로 있으란 법은 없다. 언제 어떤 맥락을 만나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언어가 변화하는 모습은 음성 언어뿐 아니라 문자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중요(重要)’, ‘필요(必要)’ 등의 단어에서 쓰이는 ‘요(要)’자는 원래 ‘허리’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글자의 형태가 ‘서 있는 여자(女)의 허리춤에 두 손이 얹혀 있는 형태의 글자인 덮을 아(襾)’에서 변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要)’자의 원뜻은 ‘허리’이다. 그러나 뒤에 이 글자가 ‘중요하다(essential)’, ‘요구하다(require)’ 등으로도 많이 쓰이자, ‘허리’를 나타내는 글자가 다시 만들어졌다. 그것이 바로 ‘허리 요(腰)자’이다(전광진 교수님의 페북에서). 새 글자 ‘腰’는 허리가 몸에 속함을 ‘要’의 앞에 ‘月(肉을 뜻함)’을 둠으로써, 허리의 뜻이 확실한 새로운 글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B.C 460~B.C 370)의 오래된 명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Life is short, art is long)’라는 말도 그 원뜻을 다시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된다. 그가 말했다는 ‘예술’이라는 말도, 그 원뜻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영어의 ‘Art’는 라틴어 ‘Ars’에서 왔고, 이 말은 다시 고대 그리스어의 ‘Techne’에서 왔다. ‘Techne’는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예술’이라는 뜻보다는 ‘기술’이란 뜻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술(art)이라는 말은 그 뜻이 점점 축소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예술이란 처음부터 예술로서 존재했다기보다는 일상의 생활에 필요한 기술에서 시작하여 특별히 미적인 자질이 두드러지는 오늘날의 예술 영역으로 진화해 왔음이 유추된다. 더 일반화해서 본다면, 인류의 기술과 지식이 그런 과정을 거쳐서 보다 전문적인 범주로 분화되고, 더욱 독자적인 영역으로 심화해 왔음을 엿볼 수 있다. 말의 원뜻을 거슬러 찾아봄으로써 인간의 정신과 문명의 진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03 말로 이름을 지을 때는 온갖 소중한 뜻이 다 들어간다. 서울의 거리 이름만 해도 그렇다. 세종로를 이름 지을 때는 이 거리에서 세종대왕을 생각하자는 뜻이 담겼으리라. 충무로를 작명했을 때는 이 거리에 오면 충무공 이순신을 상기하자는 뜻이 있었으리라. 을지로에서는 을지문덕을, 퇴계로에서는 퇴계 이황 선생을, 남산 소월로에서는 김소월 시인을 생각해 보자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거리를 부를 때마다 그 위대한 조상들을 가슴에 새겨서 품는가.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그 길들의 위치나 기능을 떠올리는 것으로 그친다. 그 이름들을 그냥 단순 정보로만 처리해 버린다.

 

지명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각자 이름을 지어 준 분이 기대하였던 그 이름의 원뜻과 관련하여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가. 이름 안에 소중히 심어 준 원뜻은 꺼내어 펼쳐 볼 틈도 없이, 내 이름은 그저 기능적으로만 쓰인다. 어딘가 새로운 사이트에 등록할 때 내 이름이 쓰이고, 훈련이나 회의에 나갔을 때 참석 여부를 확인하며 부르는 내 이름이 있다. 택배 아저씨가 물건을 가져와서 수취인이 맞는지 확인할 때도 내 이름이 쓰인다. 그렇게 기능적으로만 쓰인다. 의미론적으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아내가 내 이름을 부를 때는 무언가 경고를 내릴 때이다. 이 역시 기능적 쓰임이다. 이름이나 말이나 그 원뜻은 천덕꾸러기를 면하지 못한다.

 

말은 생겨날 때 그 뜻도 함께 생겨난다. 그런데 그 뜻이 그 말에 항상 반듯하게 붙어있지는 않는다. 조금씩 바뀐다. 때로는 말이 원뜻에서 멀어질 때도 있고, 원뜻이 말에서 희미해질 때도 있다. 이를 두고 말(記標)과 뜻(記意)이 서로 미끄럼을 탄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 말을 사용하는 인간이 살아가는 생태가 변하기 때문이다. 세상 만상(萬象)과 세상만사(萬事)가 다 변하는데, 그 만상을 지칭하고 그 만사를 지시하는 말이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언어의 세계는 역동적이다. 말을 배운다고 했을 때는 이런 모습을 모두 배워야 온전히 배운다고 할 수 있다.

 

말의 원뜻을 거슬러 생각해 보고, 지금 이 말의 쓰임을 조용히 관찰하듯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였으면 좋겠다. 그래야 지금 쓰고 있는 말의 뜻도 새롭게 의미를 띠고 살아난다. 그게 어찌 말의 의미로만 그칠 것인가. 사람의 의미, 세상의 의미, 존재의 의미로 번져 갈 것이다. 말의 원뜻을 거슬러 생각해 보고, 지금 이 말의 쓰임을 조용히 관찰하듯 들여다보는 자세, 나는 이것이 곧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실천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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