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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Life&여행] 영월에서 만난 단종

 

영월은 산과 강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 영월에서 유명한 인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김삿갓도 그중 한 명이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종일 것 같다. 단종에 얽힌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편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빼앗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넘겨주고 상왕이 되었던 것. 그러나 다시 노산군으로 신분이 낮춰진 뒤 영월에서 머물다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 사연이다.

 

역사를 주제로 한 답사에서 왕의 흔적을 찾는 일은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왕의 죽음에 이르는 여정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영월에서 만나는 단종은 과거의 역사 속 인물이 아닌 옆에서 같이 길을 걷던 소년이며 청년처럼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서울의 궁궐에서 만나는 왕의 이야기와 다른 차원의 역사 경험을 영월에서 하게 된다. 영월에서 길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단종의 여정, 곧 청령포와 관풍헌, 그리고 장릉을 사람들이 찾는 이유다.

 

 

청령포, 왕이 머물던 곳

 

청령포는 무척 경치가 아름답다. 서강이 휘감아 돌고 주변에는 높은 산과 우거진 숲이 있어 인상적이다. 그런데 청령포는 ‘육지 속 섬’이다. 지금도 배를 타야 청령포로 들어갈 수 있다. 강의 깊이와 너비를 생각하면 건너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 갇혀있다면 그 심리적 압박은 어떠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종이 유배된 곳이 영월로만 나와 있다. 단종은 약 2달 동안 청령포에 머물렀다고 한다. 배를 타고 처음 도착하는 곳은 대체로 ‘단묘재본부시유지비’가 있는 곳이다. 영조가 세운 비석을 중심으로 단종이 청령포에 머물 당시 모습이 재현돼 있다. 안쪽에는 기와집이 있고, 바깥에는 일하는 사람이 머물렀다는 초가집이 있다.

 

옛 기록을 보면 세조는 단종이 영월로 오는 과정에서, 그리고 청령포에 머물 당시에 갖가지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나온다. 단종이 한양을 떠날 때가 6월 중순이었는데 얼음이며 과일이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단종이 영월로 떠나는 길에 환관을 만나 성삼문 등이 ‘사육신의 난’을 일으킬 것을 알았지만 이를 세조에게 알리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니 너무 뻔히 보이는 수사가 아닌가.

 

명확한 것은 단종이 청령포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숙종 때 단종의 복권이 이뤄지고, 이후 영조는 단종이 머물렀던 곳임을 알리는 비를 여기에 세웠다. 청령포는 단종이 생애 마지막 여름을 보냈던 곳이다.

 

청령포는 영조 때 금표비가 세워진 후 잘 보존된 덕분에 좋은 소나무 숲이 됐다. 가장 나이가 많은 것으로 보이는 소나무가 있는데 관음송이란 이름이다. 사람들은 만약에 이 나무가 당시에도 있었다면 단종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들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볼 관(觀)에 소리 음(音)을 넣어 관음송이란 이름을 붙였다. 역사 속 단종의 감정이겠지만 한편으로 단종을 생각하는 요즘 사람들의 감정도 느껴지는 이름이다.

 

청령포에는 단종과 관련 있는 장소가 더 있다. 하나는 망향탑이며 다른 하나는 노산대다. 단종이 망향탑과 노산대에서 한양을 보며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산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조그마한 비가 세워져 있다. 바로 영조가 세운 금표비다. 이 비를 세운 이유는 외부 사람이 청령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지만 다르게 보면 단종이 벗어날 수 없는 물리적 공간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왕이 죽음을 맞다, 관풍헌

 

관풍헌은 영월의 관아 건물 중 하나인 객사의 일부다, 영월부 관아의 객사는 태조 시기에 창건됐다고 전해지며, 정조 때 중수됐다는 기록이 있다. 관풍헌은 객사의 동익헌에 해당하며 그 옆에 정청, 그리고 서익헌이 있다. 지금은 절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으로 쓰이고 있다.

 

단종이 관풍헌으로 옮긴 것은 홍수 때문이었다. 비가 많이 와 청령포가 물에 잠길 상황이 되자 단종은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침전으로 썼다고 한다. 관아의 누각인 자규루(당시 매죽루)에 자주 올라 시를 지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단종의 삶은 이어지지 못했다. 1457년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됐던 금성대군 등이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 발각되자 세조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사약을 내린 것이다. 결국 그해 10월 24일, 단종은 관풍헌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만,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돼 많은 사람이 죽자 단종 스스로 목을 매어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 왕방연이 차마 어명을 전하지 못하는 사이, 단종 스스로 활시위를 목에 감고 옆에 있던 종에게 활시위를 당기도록 했다고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 기록을 믿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단종의 시신을 어떻게 수습하라는 명을 공식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단종, 왕이 되어 여러 사람과 함께 하다.

 

단종이 죽자 이 지역의 호장인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모셔와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기록에 따르면 ‘동을지산’에 단종을 묻었는데 별다른 표식을 하지 못하고 석물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묻어주는 것조차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중종 때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다. 중종 36년 7월 기사를 보면 ‘영월군수가 7개월 동안 3명이 죽는 일’이 일어난 것과 관련이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월군의 업무가 멈추다시피 했다. 또 흉년까지 겹쳐 새로 영월군수로 갈 사람이 중요해졌다. 처음 영월군수 후보였던 김희성이 그 직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신 박충원을 보냈다. 그런데 이때 박충원은 일반적인 업무 외에도 조금 특별한 일을 맡았다. 박충원의 ‘졸기’를 살펴보자.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왔을 때 요사스런 일이 일어나 여러 명의 관리가 갑자기 죽는 일이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노산군이 일으킨 일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박충원이 제문을 지어 묘소에 제사를 지낸 뒤 안정되어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있는 6년 동안 별다른 탈이 없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배경은 짐작할 수 있다. 나라에서 처음 단종의 무덤을 찾은 것은 단종이 죽은 뒤 60년이 되던 해인 중종 즉위 직후다. 이때 중종은 노산군의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분묘를 수리하게 했다. 이를 담당한 우승지는 영월군 서쪽의 여러 무덤 가운데 하나인 노산군 무덤은 높이가 2자에 그쳤다고 보고했다. 다만 고을 사람들은 엄흥도가 만든 군왕의 묘라서 아이들도 식별할 수 있다고 했으니 단종의 무덤은 영월에서는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35년 뒤 중종이 다시 노산군의 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니 그때 영월군수로 부임한 인물이 박충원이다.

 

선조 때 무덤에 석물을 더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장릉으로 부르게 된 것은 조금 더 뒤의 일이다. 이때만 해도 단종은 노산군이었으니 장릉이 아닌 노산군묘였다. 세자를 제외한 대군 이하 왕실의 무덤은 모두 ‘묘’라고 하는 예에 따른 것이다.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숙종 때다. 숙종은 ‘정비가 낳은 소생은 모두 대군, 공주’라 해야 한다며 일단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높였다. 1681년의 일이다. 그리고 1698년, 드디어 숙종은 노산대군을 단종으로 복위했다. 이때 숙종이 내세운 논리는 ‘단종의 폐위가 세조의 뜻이 아니라 대신들의 잘못된 청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조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시킨 것이다. 더불어 정순왕후 역시 왕비로 복위됐다. 이렇게 왕과 왕비로 복위하자 위패를 종묘에 모시고, 무덤을 왕릉의 격에 맞도록 수축하는 일이 뒤 따랐다. 노산군과 정순왕후의 무덤에는 각각 장릉과 사릉이란 능호가 붙었다.

 

 

여느 왕릉과는 다른 느낌

 

다만 두 왕릉은 소박한 편이니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하나는 추존왕과 추존왕비의 예에 따라 왕릉을 수축한 것이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의 수를 8마리에서 4마리로 줄이고 무석인을 생략한 것은 그런 격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왕릉의 규모까지 줄어든 것은 당시 대기근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695년부터 이어진 ‘을병대기근’은 현종 때 경신대기근과 함께 조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사건이다. 그럼에도 숙종이 단종과 정순왕후를 복위하고 왕릉을 조성한 것은 민심을 달래는 효과를 기대해서였다.

 

장릉에는 몇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 엄흥도와 박충원을 기리는 정려각과 비각, 능침 앞의 소나무가 그것이다. 이 소나무는 정령송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소나무 앞 표석에 ‘남양주 사릉’에서 옮겨심은 것이라고 적혀있다. 무덤을 옮겨오거나 합칠 수는 없으니 대신 소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다.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단종과 정순왕후가 함께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보려고 했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268명의 위패를 모신 공간인 장판옥, 그리고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 배식단 역시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장릉은 왕과 왕비만 누워있는 여느 왕릉과는 다른 느낌이다. 장릉의 여러 공간에서 기리는 인물들이 모두 움직이는 걸 상상하면 다른 왕릉과 달리 꽤 활달한 모습일 것 같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단종, 혹은 정순왕후의 생각과 감정을 찾아가는 조금 특별한 여정이 되는 것 같다.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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