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에게나 소설이 있다. 그건 삶이다. 특히 유교로 점철된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여자의 삶은 존재조차도 부정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어져 온 사회적 통념은 아직도 그 흔적을 남긴 채 여성에게는 여전히 유리 천장으로 존재하는 모습이 보인다.
내 어릴 때 어머니는 여자는 죄가 많아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체념 섞인 말씀을 종종 하셨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어떤 남자를 만나는 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셨다. 평생 길쌈을 하면서 그 한을 알지 못한 음조로 중얼거리며 ‘글을 안 다면 책을 써서라도 내 한스러운 삶을 남기고 싶다’고 하셨다. 이런 어머니의 삶은 딸에게도 대물림 되었다. 50년대 말 누나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식모살이, 성냥공장, 스웨터 공장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결혼해 살면서도 내가 배웠다면 이렇게 남편의 월급만 바라보며 살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런 양성평등의 삶에 대한 복잡다단한 생각은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이란 소설이 던져준 공감이었다.
4대에 걸친 굴곡진 여자들의 삶을 들여 다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 여인들의 삶은 우리의 민족사이며 굴곡진 우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백정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일제강점기를 산 증조모 삼천이와 피란지에서 아버지의 명을 따라 이미 가정을 가진 남자와 결혼한 할머니 영옥의 삶, 호적상 엄마와 타인으로 큰 딸을 잃은 상실감으로 산 엄마 미선, 언니의 존재조차 언급할 수 없는 삶에서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딸 지연의 삶. 어쩌면 이렇게 형태는 다르지만 아픔이 대물림 되는지 작가가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눈을 돌려 한 번 보면 이런 모습은 우리 삶 속 할머니, 어머니, 형제자매의 이야기이다.
인간 생활사에서 모든 사건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대체 인간 욕망의 한계는 그 끝이 어디길레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삶과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것일까? 이 책의 본문에 나오는 말이다.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우주의 먼지에 비교도 안 되는 인간의 삶이 이렇게 다양한 욕망으로 그물처럼 얽혀있단 말인가에 안타까울 뿐이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란 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고 하였다. 이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달관한 마음의 소유자만 가질 수 있으리라. 지구상 우리의 삶은 나그네 삶이다. 제발 좋은 일만 하면 좋을 것인데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간이 다투고 싸우는 모습이 지금이다.
책 속에 펼쳐지는 일제강점기의 만행, 한국전쟁의 아비규환 속에 벌어지는 삶을 위한 또 다른 살인과 피란살이의 어려움은 시대가 만들어낸 모습이라고 단정하기엔 부족하다. 당장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혼자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전쟁을 통한 살상은 정당화되는 상황이다. 승자나 강자에게 살육이 정당화되는 게 전쟁과 세상의 모습이라면 그것을 부추기는 이면에는 언제나 인간의 욕망이 있다. 욕망으로 세상이 점철된다면 결국은 파멸로 치닫는다.
이런 욕망에 빗대어 이 책이 던진 또 다른 화두는 사랑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 사랑은 끝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 또한 개인차가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바로 증조부의 모습이다. 천주교인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 증조부의 처신과 새비아저씨의 모습은 악마와 천사의 모습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내, 남자, 아버지란 무엇인가? 오로지 여자의 일생은 이들에 의해 휘둘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 소설은 이런 가부장적인 부정적인 삶을 볼 수도 있지만,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타인끼리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우정과 사랑에 기대며 걸어가는 따스한 만남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삼천이와 새비의 우정이란 한계를 넘어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모습이다. 또한 한 세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삼천이 딸 할머니와 새비의 딸 희자의 정이 훈훈하게 한다. 백정의 딸이라고 천대받으며 체념을 일찍 배운, 사람에 대한 진정한 정이 그리웠던 삼천이는 새비 아주머니와의 관계를 통하여 서로의 시린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벗이 된다. 그들은 그게 소망이고 빛임을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추억을 영원히 간직한다.
증조모 삼천과 새비 아주머니의 한쪽 손을 잡아주는 따스한 우정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 서로에게 감싸주는 벗이 있어 그 추억으로 각자의 삶에서 고통을 마주하고 걸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부족하다. 그런 삶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자면 그것은 사랑이다. 이혼한 지연이 할머니와의 만남에서 사랑으로 다시 기운을 얻는 모습은 희망을 던져준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주인공 지연이가 이혼의 아픔을 딛고 더 기쁜 일이 생기기를 바래본다. 슬픔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것은 더 큰 슬픔이다. 그러나 그 슬픔 속에 사랑의 씨앗은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