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열차역 플랫폼의 바람은 너무 차다. 햇빛과 달빛, 기다림과 이별의 사연이 켜켜이 쌓여 달려온 바람은 레일 위를 차갑게 안겨 오고 빠져나간다.
둘째 아이가 도회에서 유학하다 보니 마땅한 버스 편이 없어 집을 찾을 때면 인근 도시의 열차역을 이용한다. 올 때 승용차로 데려오고 갈 때 바래다준다. 종종 있는 이 일이 귀찮을 것 같지만 아이를 만난다는 기쁨에 오히려 반가움과 아쉬움이 넘쳐난다.
플랫폼에서 열차 도착을 기다리는 몇 분의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드디어 열차가 도착하니 노란 선 안쪽에서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이 울리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헤어질 때 승차를 알리는 방송에 따라 아이는 ‘안녕히 계세요.’ 메아리만 남긴다. 휑하니 멀어져 사라지는 열차의 후미등을 바라보면 가슴이 멍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만날 텐데 무슨 걱정이냐며 가슴을 추스른다.
부모에게 자식은 성장해도 언제나 보살핌의 대상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처럼 모든 일에 힘과 보탬이 되어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누가 그랬다. 자식은 바람(風)이라고. 내 몸 빌어 이 세상에 나온 한 줄기 꽃바람이라고. 부모는 자식이라는 귀한 알맹이 하나 이 세상에 내보낸 바로 그 순간부터 그만 껍데기가 되고 만다. 이 껍데기에 귀만 대면 늘 한 줄기 바람 소리가 들린다. 때로는 부드러운 솔바람으로, 꽃샘바람으로, 애틋한 눈물 바람이 되어 늘 가슴에서 가슴으로 불어댄다. 자식은 단잠 속 아스라한 꿈길에서조차 마음의 문밖을 서성이는 애잔한 바람 한 줄기라고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설날이다. 고향의 부모는 자식 기다림에 설음식 준비를 시작하고, 그 풍경은 전통시장과 버스 정류장에서 진하게 묻어난다. 허리도 제대로 못 펴시고 굼뜬 몸은 염낭거미나 가시고기처럼 좋은 것은 자식에게 다 주어버리고 노쇠한 모습이다. 쑤시는 허리와 무릎 통증도 그리움과 반가움에 마취 당하여 오로지 내 자식 좋아할 것이란 기대감에 반가움이 숨이 있다.
그러나 이런 설 준비에 기울인 마음도 정작 자식을 마주하면 썰렁해질 때가 많다. ‘몸도 편찮으신데 뭐 한다고 이런 걸 준비했어요.’ 염려와 짜증 섞인 자식의 지청구를 듣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하지만 부모는 이 또한 반가운 푸념으로 사랑으로 감싼다.
명절 때 자식의 고향 찾는 마음은 어떠할까? 부모님 마음처럼 그리움이 나침반 되어 무게 없이 출렁이는 고향길을 손꼽아 왔을까? 자식된 이는 한 번 가슴에 손을 얹어 볼 일이다. 이런 반가움과 서운함 속에서 요즘 세상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이야기가 있다. 자식은 끓는 국을 갖다주면 꼭 먹기 좋게 식을 만한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
이 거리라는 것이 비단 지리적인 거리만일까? 애끓는 마음이 식어 따뜻해질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거리를 의미이기도 하고, 성장한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염려가 올바른 것인지를 알려주는 거리이기도 하다. 부모 자식 사이에 거리를 둔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표현이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가 더 현명하게 ‘거리’를 헤아리며 살아야 늙어가는 마당에 부모와 자식 간의 원만한 관계 유지의 방법이 아닐까?
부모의 역할을 생각하면 떠 오르는 하나가 시룻번이다. 시룻번은 섣달그믐날 시루떡을 찔 때 김이 새지 않도록 시루와 솥 사이에 붙였던 밀가루 혹은 쌀가루로 만든 반죽이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 시루떡을 찌는 날 아이들은 부엌 문지방이 달도록 드나들었다. 시룻번을 때어내는 순간 아이들은 구워지다시피 노릇노릇한 시룻번을 서로 먹으려고 한다. 이렇게 남은 시룻번은 말려 놓았다가 정월 대보름 저녁에 먹거나 부름으로 깨물기도 하였다. 이 시룻번의 역할에서 부모 모습을 찾는다.
자식이 생활하는 사회는 처절한 생존의 현장이다. 어제는 분하고 억울해서 울고, 오늘은 그리워 슬퍼서 울고, 내일은 병들어 아파서 우는 더불어 부대끼는 모습이 자식의 일상이다. 이런 현장에서 부모는 자식이 어려움을 이기고 무탈하게 살기를 소망하며 시룻번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시루 팥떡은 가마솥과 시루 사이 이음새를 밀가루 반죽 돌돌 길게 말아 꼭꼭 다져 붙인 시룻번이 오열하는 가마솥 눈물을 다 삼켜내야 비로소 쫀득쫀득해진다. 팥떡이 자식이라면 이를 완성하도록 도와주는 게 부모란 시룻번이다.
그렇게 단단하게 철저하게 시룻번 발라 키워낸 자식이지만 부모의 마음을 닮지 못한다. 자식이 시큰둥해도 시룻번 같은 부모는 불만이 없다. 삶에 있어 부모는 주인공은 되어보지 못하고 언제나 드러내지 않는 그림자처럼 맡은 일을 하고 있다. 시룻번 같은 부모님의 주름, 세월의 바다에 인생의 파고를 넘으면서 마음의 주름에 골은 더 깊어져도 자식은 타오르는 그리움의 불길이다.
음력 임인년도 얼룩진 세월의 검붉은 뒤안길을 건너고 있다. 쉼 없이 깎고 긁은 세월의 나무 기둥 한 해의 기간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가슴에 묻자. 세상의 모든 부모는 바람의 부모이고 세상의 모든 자식은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이 세상을 떠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