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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체적인 삶(삶의 주인), 노예적인 삶(삶의 노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 속에는 크게 두 가지의 상반된 면이 존재한다. 무의식적으로 타인에 의해서 강요당하거나 법과 규정에 의해서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피동적인 삶의 자세와 반면에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역동적인 삶의 자세가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삶의 궤적을 남긴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타인과 구별되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 온 사례가 돋보인다. ‘Yes’라고 말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강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진정한 역사의 영웅(Hero)으로 인정받는다. 권력자 앞에서 No라고 말하기는 자신의 운명에 모험을 거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당당히 역사 앞에서 존재감을 발휘한 경우도 많다.

 

중국 당나라의 위징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당 태종 앞에서 언제나 당당하고 용기있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충언을 했다. 오죽하면 태종 이세민이 후에 그를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고 고백했을까. 하지만 그런 충신을 곁에 두었기에 후세가 경애(敬愛)하는 ‘정관의 치’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전성시대를 영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자고로 위대한 지도자 곁에는 늘 바른 말로 간언하는 충신들이 존재했다. 몇해 전에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청나라의 침략을 받은 절대 절명의 누란의 위기에서 척화파와 화친파를 이끌었던 두 중심인물의 주장을 들을 수 있었다. 화친론자(주화파) 최명길과 척화론자(주전파) 김상현의 대립이 그것이다. 특히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했던 김상현은 치욕스런 역사를 허용하는 것을 끝까지 아니 된다고(No) 말했던 충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대에 따라 역사를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둘 다 나라를 위한 충신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그래도 현장에서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는 역사가 잊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 병자수호조약의 체결에 결사반대하며 광화문 앞에 도끼를 어깨에 메고 나와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끝까지 “아니 되옵니다”라고 외쳤던 최익현의 철저한 보수주의적 사고도 한편으론 국가를 생각하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와 같이 ‘그렇게 안 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은 오늘을 사는 정치인들과 확실하게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의 단편 소설인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 라는 책에 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뉴욕 월가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필경사를 찾는 광고를 내었는데 이를 보고 바틀비가 찾아온다. 화자인 변호사는 열정적인 변론보다는 부자들의 계약서, 저당 증서, 부동산 권리 증서를 다루는 편안한 일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는 직원인 터키, 니퍼즈, 진저 넛, 그리고 바틀비와 함께 일한다. 그런데 일하는 도중 변호사가 부탁하는 일에 대해 바틀비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가 꽃을 피운 뉴욕의 월가에서 일개 필경사로 일하던 바틀비는 세계인들에게 회자(膾炙)되는 명언을 남긴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바틀비는 모든 일을 거부하고 심지어 먹는 것마저 거부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정의롭지 못하고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 과감하게 반대할 수 있는 용기와 지성은 오늘을 사는 직장인,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직업윤리, 생활윤리를 제시한다.

 

고등학교는 야간에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명목으로 특별실(면학실)을 자유롭게 개방한다. 학원에서 사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늘 지쳐있고 힘들어 대부분 참여를 꺼린다. 그런데 혼자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학생들도 있다. 학원도, 방과후 활동(보충수업)도 참여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려고 야간에 교실 개방에 참여하는 학생들이다. 필자가 어느 날 왜 학원에 안가고, 보충수업도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대뜸 하는 말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요즘 추세에 의하면 그야말로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체득하여 자기 주도적인 공부에 몰입하는 학생이자 삶을 주체적으로 온전하게 살아가는 학생만이 대답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 학생에게는 하나라도 더 도와주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교사의 심정이다. 그래서 학습 보조 자료를 건네주기도 하고 질문에 열과 성의로 답변하여 가르쳐 준다. 그런 학생은 자생력이 강해서 질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쳐서 기초학력이 날로 신장된다. 오늘날 그런 학생이 매우 드물다. 대개는 이것저것에 연류되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러니 배운 것을 익히고 생각하는 시간이 절대 부족하다. 그저 시간의 노예가 되어 부지런히 활동하는 것 같지만 의식은 꺼져가는 촛불처럼 활력이 없고 마치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다 할 것이다.

 

 우리들은 얼마나 자발적인 거부를 할 수 있을까? 주변의 눈치 때문에, 사회적 지위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 거부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피동적으로 따라 하는 것도 한심하다. 바틀비는 자발적으로 노동을 거부하고, 삶에 대해서도 거부한다. 이처럼 개성 있는 캐릭터는 삶의 현장에서 늘 주목받는다. 그리고 사람들의 격려와 응원을 받는다. 왜냐면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을 얻기 때문이다. 바틀비는 현대인에게 일종의 스타 탄생이라 할 수 있다.

 

요즘 부쩍 미국 작가 H. D. 소로우의 『시민 불복종』 이라는 책에 관심이 간다. 이는 곧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당당히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지성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등학생 누구나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생각 없이 덩달아 대학교에 진학하려는 관행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공부보다는 암기식 벼락치기 시험공부에 대해서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깨어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이는 더 나아가 사회 어느 곳에서도 구태의연한 관행과 절차를 거부하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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