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한 장의 그림을 잊지 못한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딱 보기에도 첩첩산중인 험난하고 깊은 산과 큰 나무로 둘러싸여진 고립된 집. 집에서 시작된 길은 다리로 이어지지만, 돌더미에 가로막혀 있다. 단절된 길 때문에 가지 못한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강물에는 사람이 떠내려가고 있다.
잘 그린 풍경화 속에는 현실이 어떻게 아이의 꿈을 빼앗아 갔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는지, 내가 뭘 할 수 있겠냐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한 장의 그림에 담긴 심리적 정보, 풍경화구성법
풍경화구성법은 종이에 강·산·밭·길·집·나무·사람·꽃·동물·돌이라는 열 가지 항목으로 풍경화를 완성하는 미술치료기법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의 내면세계가 도화지에 펼쳐지고,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내면세계는 더욱 구체화된다. 풍경화구성법의 최대 장점은 이야깃거리를 풍부하게 던져준다는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데로 그린 그림에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답하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아이들은 자신의 심리적 정보를 하나둘 꺼내놓는다.
풍경화구성법은 이전에 소개했던 심리검사보다 실시방법이 조금 복잡하지만, 어렵지는 않다. 물론 전문적인 해석까지는 무리가 있지만, 어려움이 있는 학생을 찾아내서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풍경화구성법은 내용이 다소 많기 때문에 여러 번에 나누어 설명한다. 이번 호에서는 실시방법과 풍경화 구성요소 중 강·산에 대해서 살펴본다.
● 준비물과 실시방법
- 준비물: A4 용지(8절지 도화지 가능), 사인펜·색연필 혹은 크레파스
- 실시방법
① A4 용지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테두리를 그린 후, 필기구와 함께 제시한다.
② 다음 지시사항에 따라서 그림을 그리게 한다.
“지금부터 풍경화를 그릴 거예요. 그림을 잘 그리거나 못 그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풍경화에 필요한 10개의 항목을 차례대로 불러드리면, 생각나는 대로 편안하게 그려주시면 됩니다.”
③ 풍경화에 필요한 10개의 항목 강·산·밭·길·집·나무·사람·꽃·동물·돌을 순서대로 불러준다.
“먼저 강을 그려주세요”
“자, 강을 다 그리셨으면, 다음은 산을 그려주세요.”
…(중략)…
“자, 마지막으로 돌입니다. 돌을 그려주세요.”
※ 10가지 항목은 한꺼번에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강→산→밭→길→집→나무→사람→꽃→동물→돌 순서대로 제시해야 한다.
※ “강은 어떤 크기로 그리나요? 호수를 그려도 되나요?”, “동물은 몇 마리 그리나요?” 등의 질문에 “떠오르는 대로 그리시면 됩니다”라고 한다. 최대한 자신에게 떠오른 이미지 그대로를 표현하도록 한다.
④ 10가지 항목을 모두 그리면, 다음과 같은 지시문을 이야기한다.
“제시한 항목으로만 풍경화를 그렸기 때문에, 뭔가 아쉬운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더 그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더 추가해서 그릴 수 있습니다.”
⑤ 추가항목까지 모두 그렸다면, 색칠하도록 한다.
“다 그렸다면, 색칠을 해주세요.”
⑥ 색칠까지 모두 끝났다면, 그림에 대한 질문을 한다.
※ 필자는 색칠하는 시간을 따로 주지 않고, 색을 칠하는 동안 질문을 한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함도 있지만, 색칠하면서 답변을 동시에 하면 더욱 무의식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기 때문에 내면의 생각을 더 잘 표현한다. 이렇게 발문한다.
“다 그렸다면, 지금부터 색칠을 해주세요. 색칠하는 동안 그림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그림을 그렸듯이, 질문에 대한 답변도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면 됩니다. 말이 되는지, 앞뒤 문장이 연결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떠오르는 대로 말해주세요.”
● 풍경화구성법 순서와 채색의 중요성
풍경구성기법은 구성요소를 순서대로 그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공개한다면, 계획된 구도로 풍경화를 그리기 때문이다. 풍경화구성기법의 목적은 ‘잘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각각의 구성요소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즉 ‘강·산’처럼 자연발생적으로 생겨진 공간과 각각의 요소를 이어 줄 ‘길’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그림검사하면 떠오르는 ‘HTP’, 즉 ‘집·나무·사람’을 어디에 배치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실시방법에서 제시된 것처럼 반드시 순서대로 하나씩 제시해야 한다.
채색 또한 중요하다. 유난히 산에 집착해서 덧칠하기도 하고, 특정 항목에만 색을 칠하지 않기도 한다. 산은 작고 강은 크게 그렸지만, 강은 연하게 칠하고 산은 진하게 덧칠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색칠에는 심리가 많이 반영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색칠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색칠하는 시간을 따로 줘도 좋고, 색을 칠하는 동안 질문을 해도 된다. 모든 그림검사가 그렇지만 풍경화구성법 역시 기계적인 해석을 피하고, 풍경화가 주는 전체적인 느낌과 그림에 담겨있는 이야기 등을 서로 이야기 나누며 상호작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각의 구성요소가 주는 의미
그럼 이제부터 각각의 구성요소에 대해 물어보면 좋은 질문이 무엇이고, 그 질문이 왜 필요하며, 각각의 구성요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특히 눈여겨봐야 할 점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강
강은 무의식 세계를 의미한다. 무의식 세계는 자동적으로 나오는 습관적 행동(사고) 패턴이다. 만약 비효율적이고, 잘못된 방식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면 대인관계능력과 적응력이 떨어져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문제는 스스로 알아차리지 전까지 계속 반복하며 실패경험을 쌓는다는 것이다.
강과 관련된 다음의 질문들은 아이들의 무의식 세계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 이 강은 얼마나 넓고 큰 강이니?
- 이 강을 건널 수 있니? 건너면 무엇이 있니?
- 이 강은 깨끗하니? 어느 정도로 깨끗한 강이니?
● 종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큰 강
아이들은 엄청 큰 강을 그리고도 작다고 하고, 작게 그리고도 큰 강이라고 한다. 따라서 강의 크기와 깊이는 질문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다.
강은 대부분 <그림 2>처럼 종이 하단에 1/4가량의 크기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림 3>처럼 종이의 2/3가량을 차지하게 그리는 경우도 있다. 풍경화에 필요한 구성요소 10가지를 차례로 불러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제시된 강을 종이의 절반 혹은 2/3 이상 차지하게 그렸다면, 무의식적인 습관·패턴으로 살고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무의식적인 습관·패턴을 개선하려면 우선 알아차리고, 수정을 다짐하고, 반복해서 연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강이 과하게 크다면 행동(사고) 패턴을 살펴보고, 더 효과적인 행동과 의사결정으로 적응력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 건널 수 없는 강
강을 건널 수 있는지도 의미가 있다. 강에 다리를 그려 넣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리지 않는다. 하지만 ‘강을 건널 수 있느냐’는 질문에 ‘강이 얕아서 건널 수 있어요’, ‘강 위쪽에 다리가 있어요’ 등의 답을 한다. 물론 건널 수 없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
다리는 대부분 길과 이어진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다음 호의 ‘길’ 구성요소에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강을 건너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고, 강을 건너면 또 다른 마을이 나온다는 아이들도 있다. 그 마을에 가고 싶은지, 가기 싫다면 왜 가기 싫은지 등의 추가 질문으로 아이들의 생각을 구체화해도 좋다.
● 강가에 쌓아 올린 돌
강가에 정성스럽게 돌을 쌓아놓는 경우도 많다. 이는 무의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의지, 즉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아주 강박적이거나, 높게 쌓여있거나, 크기가 매우 크지 않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오히려 자신을 지키는 힘으로 볼 수 있어 적당한 경계는 건강한 정서상태로 볼 수 있다. <그림 4>와 <그림 5>는 모두 강에 돌을 쌓았지만, 느낌은 전혀 다르다. 심지어 <그림 5>는 길이 강 앞에서 끊어진 것도 모자라 돌로 막아놓았다.
● 물고기가 죽어있는 더러운 강
대부분 아이는 물고기가 살고, 물에 들어가서 놀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다고 한다. 하지만 간혹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 때문에 더러워서 악취가 나고 강가에 핀 꽃들도 모두 죽어있다고 하는 아이도 있다. 물의 맑기를 통해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2. 산
산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장애물, 즉 극복해야 할 어려움을 시사한다. 그래서 산은 얼마나 높은지, 뾰족한지 완만한지, 올라갈 수 있는지 여부, 위험한 동물이 사는지 여부 등을 묻는 질문이 중요하다. 또한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 본 적이 있는지, 올라가지 않았다면 왜 그랬는지 묻는 것도 도움이 된다.
- 얼마나 높은 산이니?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산이니? 끝까지 올라가 봤니? 그럼 올라가 본 사람은 있니? 왜 넌 안 올라갔니?
- 위험한(무서운) 산이니? 왜 위험하니(무섭니)?
- 이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니?
● 위험한 산, 접근할 수 없는 산
대부분은 등산이 가능한 평범한 산이라고 답한다. 정상까지 올라가 봤다는 답도 많고,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했다는 대답도 종종 있다.
문제는 산 자체가 위험한 경우이다. <그림 7>의 왼쪽 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이라서 아예 돌로 출입을 봉쇄했다. 오른쪽 산은 꽃이 만발했지만, 사실은 무서운 늑대가 산다. 뿐만 아니라 강에는 식인 물고기까지 살고 있다. 아이들은 곧 죽는다는 사실을 모른 채 놀고 있다.
<그림 8>처럼 산 정상이 암벽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은 올라가지 못하고, 전문장비를 갖춰야만 올라갈 수 있는 경우도 있다1.
산이나 강에 배치되는 동물·꽃·돌은 산을 그릴 때 그려지기보다는 ‘동물·꽃·돌’을 그리는 8·9·10 순서에서 등장한다. 자기 삶에 장애물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외부요인인 동물·꽃·돌을 첨가하면서 회피하거나 지금의 행동을 합리화하곤 한다. 처음에 소개한 <그림 1>처럼 깊고 험한 산이라서 오르지 못한다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포기상태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오를 수 있는 산인지, 정상까지 올라가 봤는지, 왜 오를 수 없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은 문제해결방법을 찾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다음 호에서는 자신의 노력 정도에 따라 크기와 수확량이 달라지는 ‘밭’과 산·강·밭·집 등을 연결시켜주는 ‘길’에 대해서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