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 발리. 특유의 신비롭고 여유로운 분위기로 여행자들의 인기를 얻는 곳이다. 바다를 즐기며 느긋한 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번에는 발리의 예술도 함께 즐겨보자.
# 바다
발리를 ‘신들의 섬’이라고 부른다. 그럴 만한 것이 약 2만 개의 힌두교 사원이 있고, 신과 관련한 다양한 축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전역이 이슬람교를 믿지만, 발리섬만은 특이하게 힌두교를 믿는다. 이는 인도네시아에 번성하던 힌두교가 16세기경 이슬람 세력을 피해서 발리섬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발리에는 힌두교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발리를 신들의 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발리에 사원이 많고 발리인들의 삶에 신이 녹아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발리를 여행하다 보면 신이라는 절대자가 아니고서는 발리의 아름다움과 여유를 창조해 내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신이 이토록 아름다운 섬을 만든 이유는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이 인간세계를 다스리느라 피곤해진 자신의 심신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섬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아마도 쉬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발리를 찾았다면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친절한 미소로 여행자를 바라보는 사람들, 야자수 사이로 쏟아지는 찬란한 햇살,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해변,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 레스토랑과 세련된 풀빌라로 가득한 곳이 바로 발리이기 때문이다.
먼저 해변에 대해 이야기하자. 발리의 해변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쿠타(Kuta)와 누사두아(Nusa Dua) 해변이다. 발리 남부에 자리 잡은 쿠타 해변은 1960년대 히피와 서퍼들이 몰리면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발리의 최고 번화가로도 손꼽히는데, 현대적인 호텔과 멋진 부티크, 야외식당과 바, 서핑용품 매장, 환전소 등이 5km에 걸쳐 늘어서 있어 늘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특히 쇼핑 마니아라면 이곳에서 샌들·수영복·서핑용품·기념품 등 다양한 상품들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폴로·리바이스를 비롯해 진짜인지 의심이 가는 베르사체 등의 명품 매장까지 있다.
쿠타의 진면목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 지나간 후, 밤이 내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만날 수 있다. 시끌벅적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곳곳에서 발리댄스 공연이 펼쳐진다. 태국 방콕의 카오산로드나 푸켓 빠통비치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열기는 이에 못지않다.
쿠타 해변의 명성을 듣고 이곳을 찾은 이들은 다소 실망할지도 모른다. 쿠타의 바닷물은 생각했던 것만큼 투명하고 깨끗한 곳은 아니다. 지중해나 피지의, 바닥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바닷물을 상상했다가는 이내 실망한다. 그렇다고 순백의 모래가 끝없이 펼쳐지는 절경의 해안도 아니다. 그런 해안을 꿈꿨다면 오히려 필리핀 보라카이가 더 낫다.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이 해변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거침없이 몰아치는 파도 때문이다. 호주와 유럽 출신의 서퍼들이 쿠타의 파도에 반해 하나둘 몰려들었고 마침내 쿠타는 세계 최고의 서핑 포인트가 됐다. 쿠타 비치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친 파도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다.
누사두아 해변은 쿠타 해변에 비해 한적하고 로맨틱하다. 코코넛 나무가 둘러쳐진 3.5km의 백사장을 따라 야외 테이블을 갖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다. 또한 고급리조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방해받지 않는 휴가를 보낼 수 있다. 짐바란(Jimbaran) 비치 역시 아름다운 일몰을 배경으로 로맨틱 시푸드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누르(Sanur) 해변은 발리에서 처음으로 해변 호텔이 지어진 곳이다. 지금은 전성기를 지나 쿠타와 누사두아 해변의 명성에 가려진 듯하지만, 최근 들어 옛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 여행자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이곳은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신만의 편안한 시간을 가지려는 여행객들이 더 선호한다.
발리에 머무는 동안 사누르 해변에 자리한 어느 리조트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옆 방갈로에는 캐런이라는 젊은 캐나다 여인이 묵고 있었다.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는 그녀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그는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2주를 보내고 발리에 온 지 열흘이 됐다고 했다. 그녀의 휴가는 3개월. 발리에서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당분간’이라며 ‘아마 한 달 정도가 되겠지?’라며 이를 환하게 드러내고 웃었다.
그녀가 이야기했던 대로 발리의 해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일이다. 해변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발리의 상징인 빈탕 맥주를 마시는 일.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낮잠에 빠져드는 일. 인생에는 이런 순간이 몇 년에 사나흘은 필요한 법이니까.
# 예술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서른한 살의 주인공 리즈가 성공적인 뉴요커 생활을 집어던지고 달려간 곳이 바로 발리 내륙에 위치한 ‘우붓’(Ubud)이다. ‘발리 예술의 심장’으로 불리며 수많은 사원과 박물관 그리고 미술관이 어울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인도네시아의 현지 예술가들을 비롯해 외국의 수많은 예술가도 이곳에서 지내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우붓에서의 발리 예술은 16세기, 당시 이슬람 침략을 피해 발리로 건너왔던 왕족들이 예술인들을 함께 데리고 오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네덜란드 식민지시기를 거치며 ‘예술 마을 우붓’이 탄생하게 된다.
1920년대 기얀야르 영주이자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최대 협력자였던 수카와티 부자는 우붓 왕궁 한쪽에 숙박시설을 마련하고 유럽 예술가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발리에 초대된 예술가는 독일인 화가 월터 스피스(Walter Spies)와 네덜란드 화가 루돌프 보네(Rudolf Bonnet).
특히 월터 스피스는 1927년부터 1940년까지 13년간 우붓에 살면서 발리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화가 이외에도 음악가·언어학자·무용가·연출가이기도 했던 그는 현재 공연되는 발리의 유명한 ‘께짝 댄스’와 ‘바롱 댄스’를 확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구미의 잡지에 발리의 회화와 사진을 발표하며 발리를 세계에 알렸던 그는 서구의 예술가와 학자들이 우붓에 자리를 잡게 만든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우붓 거리를 걷다 보면 왜 이곳이 발리의 몽마르트로 불리는지를 알 수 있다. 1,500여 미터 정도 거리에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줄지어 서 있다. 이름난 미술관도 예닐곱 곳 있고, 모퉁이마다 작은 갤러리들도 자리하고 있다. 이들 갤러리는 저마다 독특한 그림을 내걸고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열대 특유의 강렬한 색감으로 시선을 모으는 작품들도 있고, 발리 자연이나 사원·동물·여인 등을 소재로 한 작품도 있다. 난해한 추상회화도 눈에 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아서 세심히 둘러보면 다른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독특한 작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발리회화의 특징은 발리 토착회화와 서양화가 사이좋게 결합했다는 것. 발리의 토착회화에 서양의 원근법과 음영법이 도입되면서 독특한 회화가 탄생했다. 발리회화에는 크게 우붓 양식과 바뚜안 양식이 있는데, 우붓 양식은 발리의 아름다운 자연, 사원 풍경, 농사를 짓거나 과일을 따는 풍경 등을 주로 그린다. 바투안 양식은 우붓 남쪽의 바뚜안 마을에서 그려진 서양화 스타일이다. 발리의 신화적인 세계를 표현하며, 밝고 원색인 우붓 양식과는 달리 검은색과 모노크롬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바투안 양식 또한 서양화의 원근법과 음영법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붓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은 네카 미술관이다. 우붓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한, 발리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다. 회화 수집가인 네카가 설립했다. 발리의 토착 전통회화는 물론 우붓 양식, 바뚜안 양식의 회화들이 연중 전시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회화와 발리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흑백사진도 전시돼 있다.
네카 미술관 외에도 스페인 출신의 화가가 만든 블랑코 미술관, 우붓에서 ‘서양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궁 라이나가 지은 아르마 미술관 등도 돌아볼 만하다. 잘 꾸며진 정원과 연꽃에 둘러싸여 있는 루키산 박물관은, 발리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 박물관이다. 현대 전통 발리회화와 목각작품들을 연대순으로 전시해 놓아 발리 미술의 변천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작은 공방과 화방도 많으니 부담 없이 돌아보는 것도 좋다. 나무 조각품, 가구를 만드는 공방,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그림을 걸어놓은 화랑 등이 늘어서 있다. 정교한 목각과 세공품으로 가득한 상점들의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인사동을 걷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최근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몰려들면서 분위기가 다소 소란스러워졌지만, 조용한 뒷골목 등은 여전히 다정하고 매력적이다.
화랑과 공방을 지나다 보면 걸음은 자연스레 재래시장에 닿는다. 코코아나무로 만든 식기며 대나무로 짠 가방, 울긋불긋한 열대과일 등이 발목을 붙잡는다. 가격도 착하다. 여느 관광지의 시장이 그렇듯 부르는 게 값이지만, 두 눈 딱 감고 흥정에 돌입하면 1/4 정도의 가격에도 물건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