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를 끝으로 신문수 화백의 '도루묵 선생'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도루묵 선생'을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작 '모던 타임스'를 보면 찰리 채플린의 표정과 손동작만 봐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말소리가 전혀 없는 작품인데도 요즘 영화 못지않게 감동을 주는 것은 채플린이 표정과 손동작 같은 제스처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70%는 제스처 제스처는 세계 공용어다. 채플린 영화는 번역 없이 세계 어디서나 인기를 끈다. 해외여행을 할 때도 우리는 채플린처럼 할 수 있다. 대개 세계 어디서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긍정의 표시이고, 좌우로 흔드는 것은 부정의 뜻이다. 또 이빨을 드러내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은 적대적 공격 의사다. 악수는 우정과 협조를 상징한다. 말과 글이 있으니 제스처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연구에 따르면 지금도 동일 언어의 문화권에서는 의사소통 중 30%만 말로 이루어지고 나머지 70%는 비언어적 행동, 즉 제스처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최근에는 인간의 말도 수화와 같은 제스처로부터 진화했다는 이론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손동작이 말할 때 단어를 빨리 떠올리게 도와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청각 장애인이 수화를 할 때 쓰는 뇌의 영역이 보통 사람이 말을 할
박준용 | 한양대 강사, 문화평론가 영화 같은 실제 교사의 고군분투 사람들은 어떤 극적인 사건을 접할 때 흔히 '이건 마치 영화 같은데!'라고 말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극적인 사건을 가상하여 만든 영화보다 현실이 더 극적일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새삼 놀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화 가 다룬 1999년 미국 리치몬드 고등학교의 체육관 폐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농구부 코치 '겐 카터'가 학생들의 성적 미달을 이유로 당시 연전연승하고 있던 팀의 훈련은 물론 경기까지 포기하고, 아예 체육관마저 폐쇄시켰다. 낙후된 지역에서 유일한 성공의 희망을 농구에서 발견해 왔던 선수들은 물론 그들의 부모, 그리고 이들의 승리에 고무되어 있던 지역 주민들은 당연히 이 극단적 조치에 격렬히 항의하는 등 일대 물의가 빚어지게 되었고, 이 사건은 언론에 의해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된다. 영화 는 연전연패하던 쇠락의 빛이 역력한 리치몬드 고교에 카터가 부임하면서 시작한다. 그가 처음 학교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한 일은 선수들과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농구를 계속하고 싶다면 최소한 C정도의 성적 이상을 올리고 수업에 들어가 앞자리에 앉으며, 시합에
장옥순 | 전남 마량초 교사 올해로 교직에 첫발을 디딘 날지 26년이 됐다. 첫 부임지도 바닷가 학교였는데 올해 찾아온 이 학교도 운동장 너머로 출렁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이제 보니 저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편안하게 바라본 적이 없었던 150일이었다. 마량항에서 완도 고금도를 향해 건너가는 여객선을 2층의 우리 반 교실에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우리 반 20명 개구쟁이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 부스러기들을 하나씩 주워 담아 청소를 하며 혼자서 실실 웃는 시간이 늘어나는 오후 시간의 즐거움. 며칠 전, 알림장을 제때에 쓰지 않고 영찬이와 쫑알대며 장난치는 승현이에게, “그렇게 늦게까지 알림장을 안 쓰면 선생님이 뽀뽀를 해버릴 거야! 선생님이 볼에 뽀뽀를 하면 장가도 못 가요”했더니, 승현이가 얼른 대꾸를 하였다. “그럼, 선생님한테 장가가면 되지요.” 뭐라고? 선생님은 이미 시집을 갔고 너무 늙었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영찬이가 말대꾸를 했다. “아니에요. 선생님은 하나도 안 늙었어요.” 그것뿐이 아니다. 밥을 늦게 먹는 강이와 아영이의 식사 지도를 하고 교실에 들어오니 유림이와
조은경 | 전주 근영중 교사 누구나 이맘때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서면 아쉬운 점들과 기뻤던 일들이 하나 둘 떠오를 것이다. 교육계는 급격한 사회 변화와 함께 공교육의 난항과 교육 개혁, 교권 회복을 위한 대책마련 및 자성의 목소리가 컸었다. 공교육 담당자의 입장에서 통감하는 바이며 개인적으로도 올해 유난히 학생들에게 역사와 국제이해 부분을 가르치고 생활지도를 하면서 무엇이 올바르고 적절한 것인지 고민하는 때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필자는 항상 넓은 시야, 다양한 경험 그리고 열린 마음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물은 흘러야 생명력을 유지하듯이 교육의 방향 역시 변화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2006년 대외적으로는 한·일 공동수업, 한·중·일 평화교재실천교류회, 북경 역사회, 국제이해학회 참가 등 분주하고 귀한 경험과 배움을 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박물관 체험 교실’과 ‘외국인과 함께하는 문화교실(CCAP)’을 운영하며 학생들과 함께 실천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한 시간들이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봄, 가을에 일본의 역사 교사와 전통문화 전공 교수를 초청하여 공동 수업을 하였는데 3월 말에는 요코하마의 스즈키 선생님과 함께 한국
이영관 | 경기 수원 제일중 교감 필자에게 2006년은 한마디로 격동의 해였다. 3월 1일, 2년간 근무했던 학교를 떠나 거주지 가까운 곳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출근 시간이 20분에서 5분으로 바뀌었다. 학교에 볼 일이 있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가도 된다. 태어난 고향에서 물리적 공간이 가까워지니 마음도 편안해지고 학교에 애정이 더해지는 기회가 되었다. 4월 27일에는 교육칼럼집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1년여 넘게 ‘한교닷컴’에 쓴 기사 정수(精髓)를 모으고 평상시 쓴 글을 주제별로 모으니 번듯한 한 권의 책이 되었다. 하나의 창작품을 만든다는 것, 개인사에 큰 족적이 아니던가? 한편 이 날 참석한 100여 분의 축하 속에서 더불어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평상시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는 인생 공부를 하였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분이었을까?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상위에 랭크됐다는 소식은 필자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평생 잊지 못할 ‘연수의 꽃’이라는 교장 자격연수도 했다. 시·도 연수 1주일에 이어 6월 19일부터 교원대에서 5주간의 연수가 있었다. 과제물 제출, 논술고사, 분임장 활동 등 그 바쁜 와중에 연수 과정 기록으로
변종만 | 충북 청원 문의초 교사 2006년에 우연히 필자에게 다가온 행복의 미소는 일생에서 가장 멋진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필자의 취미와 적성에 맞는 글쓰기를 하면서 즐겁게 사는 방법을 깨닫게 해준 2006년은 더욱 잊지 못한다. 노랑과 빨강의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름다운 이 가을에 아직도 승진에 얽매어서 헤어나지 못하였다면 지금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10월 중순경이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감독을 맡아 6학년 교실에 들어갔다. 요즘 아이들이 평가에 관심이 부족한 것을 알지만 혹시라도 긴장하는 아이가 있을까봐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신경을 썼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이 필자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 그중 하나가 ‘선생님은 뭐가 좋아 매일 그렇게 즐거워하느냐’는 것이었다. 모범을 보여야 할 최고 학년인데도 철부지행동을 일삼는 아이들이 던진 뜻밖의 질문이었지만 마음속의 다짐까지 꿰뚫어본 관찰력이 대견스러웠다. 한편 낙천적으로 사는 모습이 아이들 눈에 좋게 보였다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똑같은 사물을 보거나 사건을 접하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긍정적으로 보면 다 좋게 보이던
이창희 | 서울 대방고 교사 오래전의 일이다. 지금은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아주 아끼던 후배교사가 있었다. 교원임용시험을 통하여 교직생활을 시작한 첫 번째 세대였다는 것은 기억이 되는데, 정확히 몇 년 전이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첫 대면에서부터 서로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탓에 이후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풍기는 외모와 행동이 필자의 초임발령시절과 비슷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보다는 네 살 정도 아래였기에, 자연스럽게 형님, 아우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 후배가 학교에 온 지 1년여가 지났을 무렵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형님, 교사가 된 지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정말 빠르게 지난 것 같아요. 무슨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는지 모르겠네요. 봉급 열두 번 받았더니 어느새 1년이 지나 버렸네요.” “이 친구가 벌써 그것을 알아 버렸네. 조금 지나면 더 빠르다는 것을 느끼게 될 걸, 우리 지금부터 흐르는 시간을 멈추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해 볼까?” 그냥 웃고 지나쳤지만 그날 이후로 세월의 흐름을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 까라는 생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때 필자는 30대 중반을 넘어 막 후반으로 넘어
최수룡 | 대전 버드내초 교사 누구든지 사는 것이 평탄치는 않겠지만 올해에는 유난히도 정신적 고통을 무척 많이 받아 힘들었다. 직장생활에서 승진포기라는 절망은 하루하루가 목적의식 없이 무의미한 생활을 하게 했다. 나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무능하다는 생각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러다 보니 주위의 모든 분들과 연락을 끊게 되었고, 모든 모임에 의도적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꼭꼭 마음을 가두어 속내를 감추고 살아가는 생활이었다. 계속되는 이런 생활은 필자로 하여금 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했고, ‘못난이’라고 자학을 하게 되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학교에 출근해 학생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교재연구를 대충 하다가 퇴근하여, 저녁에 TV 드라마를 몇 편 보다가 지쳤을 때 잠을 자는 것의 연속이었다. 학교행사에서도 꼭 필요할때 외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직장동료 간에도 될 수 있으면 어울리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의도적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를 본 아내는 정신 좀 차리고 함께 산행이나 산책을 하자고 제의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항상 핑계를 대고 회피하였다. 번민으로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여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자게 되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