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한국의 전통 시가를 계승하며 현대 시조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가람 이병기 시인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은 답사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따뜻한 석탑’으로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미륵사지, 서동과 선화공주의 추억을 간직한 서동공원, 두 사람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쌍능을 간직한 익산. 그 곳에 가면 전통을 사랑하고 난초처럼 고결한 삶을 살다간 이병기의 고향이 있다. 시인이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생가 ‘수우재’를 비롯하여 대나무 숲에 잠든 시인의 묘소, 묵묵히 고향 들녘을 지키는 동상, 별처럼 아름다운 동심을 노래한 문학비가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수우재 - 난초 향기가 듬뿍 묻어나는 생가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진사마을 573번지. 이병기는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생가에는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와 모정(茅亭)이 있다. 고방채는 세간이나 기타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며 모정은 짚이나 풀로 지붕을 얹은 정자를 말한다. 모정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연못 앞에는 배롱나무가 수줍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6호를 지정되었다는 생가의 안내판 옆으로 1995년에 세운 문인협회의 표징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이상도 하지 묘한 버릇이 생겼어 풀과 나무를 바라보며 숨은 그림 찾는 버릇이 생겼지 햇살은 바람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데 참새 한 마리 모과 향에 취해 퍼덕이더니 사라졌지 더위에 달달 볶여 붉게 멍든 잎이 미온微溫으로 남은 참새 족적足跡을 덮는 시간. 허공으로 뻗은 뿌리 따라 하늘도 붉은 꿈을 꾸기 시작했어 노을을 향해 고개 숙인 채 가게 앞을 기웃대던 저 노인 자벌레처럼 늘어진 그림자가 유모차에 끌려가고 있더군 그림자 속에 구겨진 일상이 종이상자로 유모차에 쌓이고 파지로 남은 생흔生痕은 느릿느릿 뒤를 따르는데 원주율 따라 언덕길 오르는 저 바퀴의 정점은 어디일까 그믐달처럼 나뭇가지 끝에서 망설이고 있을 노인 숨소리 바람은 풍경 속에서 그믐달을 몹시도 흔들어대더군 유모차 바퀴 소리에 깔려 휘청거리는 밤이 오는데 숨소리는 폐지廢紙로 빈 골목을 헤매겠지. 액자 속에서 한 남자가 다가오더군 데칼코마니처럼 오른손을 들면 왼손으로만 답하는 꽤 닮았지만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이야 액자 속에서 남자가 노인의 숨소리를 따라 걷고 있어 나는 이렇게 또 다른 액자 속에 갇혀 있는데 정말 이상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