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사로 부임해 결혼 후 남편 도와 ‘부인’으로 활동 교육·의료·사회봉사 등 여성과 아동에 적극적으로 다가가 명성왕후와 돈독한 우정으로 결혼 때 100만 냥 하사받아 KMF 편집장으로 일하며 여성 차별에 비판적 목소리 내 [이윤미 홍익대 교육학과 교수]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는 구한말과 일제시기 대표적 선교사 가문인 언더우드가의 인물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여성 선교사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의 부인이자 호레이스 호튼 언더우드(원한경)의 어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기혼 여성 선교사로서, 언더우드의 부인으로 주로 알려졌지만 1888년 한국에 처음 오던 당시만 해도 의료 선교사로 부임했다. 그러다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사랑에 빠지면서 1889년에 결혼을 했고 선교사 부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851년 6월 21일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태어나 철강 자재업을 하는 부모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16세 이후에는 부친의 사업을 따라 시카고로 이주해 이재민 구호활동 등에 참여했고 시카고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9세기 당시 미국이 국내 선교에서 해외 선교로 관심이 강하게 옮겨가는
호주 의료선교사로 경남지역 학교에서 교육봉사 펼쳐 한국 최초의 신경정신과 전문의…‘사회정신의학’ 개척 신사참배 거부하자 학교 폐쇄‧투옥‧억류 등 수모 겪어 찰스 맥라렌(1882~1957)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서 의학계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신경정신과 전문의로서 관련 분야 후진 양성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 철폐와 사회복귀를 위해 노력했다. 이는 일제시기 대부분의 근대 병원들이 정신질환자들의 사회복귀가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소극적인 약물치료에 의존하던 것과 대비되는 방식으로 증상의 치료보다도 환자가 처한 환경에 대한 근본적 분석을 통해 대안을 추구하는 ‘사회정신의학’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것이기도 했다. 맥라렌은 한국 의료계에 선구적 족적을 남긴 의사로 기억되지만 그는 의사이기 이전에 호주 장로회 소속 선교사였다. 1911년 부인과 함께 호주 장로회 선교사로 입국해 진주의 배돈병원(Paton Memorial Hospital)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젊은 의료선교사였으나 1915년 선임자의 사임으로 병원 감독자가 됐고 1923년에는 서울로 파견돼 세브란스 의전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美유학시절 학생회서 미국사회에 한국사정 알리려 노력 일본 식민지정책 ‘동화주의’로 규정… 실패 폭로에 관심 해방 후 미군정 교육정책 주도자로 부상… 영향력 발휘 새교육 운동을 통한 미국식 진보주의 교육 강력히 추진 교총 전신 조선교육연합회 설립 기여… 2代 회장 역임 오천석은 해방직후 한국 교육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미군정하에서 했던 학무국 활동을 시작으로 대한교련, 한국교육학회 등 주요 기구들의 설립에 기여하고, 문교부장관을 지냈던 교육계 대표 인사였다. 이화여대 대학원장을 하면서 교육철학, 교육사학 분야에 주요 학술서적을 남긴 선도적 교육학자였고, 1960년대 이후에는 남미 여러 나라의 대사를 지낸 외교관이기도 했다. 오천석은 주로 해방 후의 활동을 중심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주요 저서들도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1960~70년대에 집중적으로 출간됐기 때문에 교육사상의 형성기라고 할 수 있는 해방이전 시기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제한적이다. 오천석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해방이전 그의 청장년기의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미국유학시절(1921~1931)은 사상의 형성기에 해당한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기독교
민족주의적 사회교육 경향 대표하는 소년운동 지도자 ‘어린이’ 용어 처음 사용…색동회 조직하고 잡지 창간 매체 중심의 교육 중시…“신문‧잡지가 교재로 더 적합” 식민지 제도교육 대체하는 대안적, 공공적 교육 전개 한국에서 진보주의 교육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갈 때 방정환(1899-1931)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방정환은 뛰어난 교육자였지만 교육학 분야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이는 그의 활동이 제도교육보다는 언론 계몽 활동이나 소년운동 형태로 주로 전개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협의의 제도교육에 제한해 본다면 그에게 교육은 주된 관심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포괄적으로 정의할 경우 그의 활동은 대부분 교육적인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다. 방정환의 방대한 저작은 식민지 시기 교육사에 대한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가 아동·청년에 대한 사회교육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수많은 동시와 동화를 남긴 아동문예 운동가이기도 했지만, 천도교 계열에서 편찬한 어린이, 학생, 신여성 등 여러 매체에 등장하는 그의 산문들을 보면 교육 사상가로서의 방정환을 조명해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