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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우리가 굳게 믿는 새교육 없이는 새 나라가 설 수 없다”

⑧천원 오천석(天園 吳天錫, 1901-1987)

美유학시절 학생회서 미국사회에 한국사정 알리려 노력
일본 식민지정책 ‘동화주의’로 규정… 실패 폭로에 관심
해방 후 미군정 교육정책 주도자로 부상… 영향력 발휘
새교육 운동을 통한 미국식 진보주의 교육 강력히 추진
교총 전신 조선교육연합회 설립 기여… 2代 회장 역임

 

오천석은 해방직후 한국 교육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미군정하에서 했던 학무국 활동을 시작으로 대한교련, 한국교육학회 등 주요 기구들의 설립에 기여하고, 문교부장관을 지냈던 교육계 대표 인사였다.

 

이화여대 대학원장을 하면서 교육철학, 교육사학 분야에 주요 학술서적을 남긴 선도적 교육학자였고, 1960년대 이후에는 남미 여러 나라의 대사를 지낸 외교관이기도 했다. 오천석은 주로 해방 후의 활동을 중심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주요 저서들도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1960~70년대에 집중적으로 출간됐기 때문에 교육사상의 형성기라고 할 수 있는 해방이전 시기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제한적이다. 
 

오천석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해방이전 그의 청장년기의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미국유학시절(1921~1931)은 사상의 형성기에 해당한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을 거쳐 일본의 기독교계열학교인 아오야마학원에서 수학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떠나기 이전에도 ‘개척’, ‘학생계’ 잡지의 편집장을 역임하는 등 매체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학부유학부터 시작해서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10년에 걸쳐 마치고 1931년에 귀국했다. 미국에서 그가 다녔던 학교들은 코넬칼리지(아이오와주), 노스트웨스턴대학, 컬럼비아대학 등이며 유학기간 동안 북미대한인학생총회(1921년 4월 결성, The Korean Student Federation of North America)에서 임원 활동을 활발히 했다. 이 유학생회는 미국 전 지역의 유학생을 포괄하는 조직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연평균 200~300명 가량의 회원이 등록돼 있었다. 
 

그는 1926년부터 이 유학생회에서 집행부 활동을 시작했으나 국문회보 등과 관련한 편집활동은 1924년부터 귀국 전까지 했다. 영문회보인 ‘The Korean Student Bulletin’(1922~1940)과 ‘우라키’(The Rocky, 1925~1936)의 편집진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영문회보는 현지의 각종 소식과 함께 유학생회에서 미국사회를 대상으로 한국사정을 알리고자 한 목적도 강해, 일종의 매체운동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해마다 게재된 학생회 연례총회의 지역모임사진에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걸어두고 있는 장면은 유학생들에게 미국이 조선과 일본이 아닌 일종의 망명지와 같은 ‘제3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1930년 ‘우라키’에 실린 ‘미국의 교육계’라는 글은 비교적 분량이 있고 전문적인 글로, 오천석이 당시 미국의 교육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첫 문장에서부터 그는 미국의 교육사가 ‘민주주의적 교육제도를 위한 혈전사(血戰史)요, 승리의 기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 미국유학생들은 미국사회가 당시 가장 선진적 국가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이 서구적 합리성과 과학주의를 대표하며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진보적인 자유민주주의국가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적어도 일본과 비교할 때 견주기 불가능할 정도의 우월한 사회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지닌 자부심의 근원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식은 그들이 발간한 매체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으며, 유학생사회에서 공유되면서 오천석에게도 그대로 수용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갖고 있었던 민족주의나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은 당대 유학생들의 의식과 다르지 않으며 공유점이 많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일본의 합병 논리의 부당성에 대한 폭로나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등이 강력한 모티브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오천석 개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당대 유학생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공유했던 의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미국 유학시기 오천석의 사회․역사관과 교육관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자료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작성한 그의 박사학위논문이다. 제목은 ‘민족동화의 수단으로서의 교육: 조선에서 일본교육정책에 대한 연구’다. 
 

오천석이 미국에서 활동한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까지의 시기는 국내에서 문화통치가 이뤄진 시기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도 자유주의적 흐름이 강했다는 특징이 있다. 오천석의 박사논문에서는 3‧1운동의 의의가 특히 강조된다. 이는 한민족의 독자성이 재확인되는 계기로서 조명되기도 하고 일제 동화정책의 실패의 근거로 주목되기도 한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정책을 동화주의라고 규정했으며 이 정책이 지니는 문제점들과 현황을 폭로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는 1895년부터 이뤄진 일본의 대만지배가 그들 정책의 실효성에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지만 조선에서는 그러한 정책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4000년의 역사를 가진 2000만 명의 인구를 언어나 문화적 지배를 통해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에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점, 일본이 교육을 통한 탈민족화와 일본화 정책을 목적의식적으로 추구해왔지만 결국 1919년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의거 등을 통해 학생대중이 반식민주의 투쟁의 선봉에 서는 결과만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 동화교육정책은 ‘실패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논지이자 결론인 것이다.
 

오천석은 미국 이민법으로 1931년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곧장 귀국해야 했다. 귀국 몇 달 후 보성전문에 자리를 잡았지만 학내에서 적응의 어려움을 겪고 1941년경 중국 상하이에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민지하에서 망명지와도 같았던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미국식 합리성과 자유민주주의를 최선으로 생각하며 반제국주의적 의식을 키웠지만,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제한됐던 것이다. 
 

보성전문을 그만 둔 이후부터 1945년에 미군정 교육관료로 재등장하기까지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검증되지 않은 주장들이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국내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던 점은 당시 백낙준, 김활란 등 귀국 미국유학생들이 일제 말 친일행적을 드러내 문제시돼온 것과 비교가 된다. 
 

해방 후에 오천석은 미군정의 주요 교육정책 주도자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는 식민지하에서 ‘제3의 공간’이었던 미국이 해방 후 재건과정에 영향을 주는 것과 관련된다. 식민지하 미국 유학생들이 남한 사회의 파워엘리트로 등장하는 현상이 본격화되면서 식민지하 비주류의 주류화 양상이 나타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해방이후 국면에서 비주류와 주류가 교차하고 정치사회적 세력 간의 위상이 변화되는 모습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오천석을 비롯한 식민지하 미국유학생들의 존재양태와 그들의 의식에 대한 문화 분석은 해방 후 미군정하 교육․사회 재건의 맥락과 성격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오천석은 식민지하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와 반일적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민주주의관과 민족주의관은 해방직후의 논란 속에서 보다 급진적 민주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해방 후 국립서울대 설립안에 대한 반대투쟁(국대안)으로 대표되는 교육 갈등 속에서 오천석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옹호자로서의 위상을 굳혔고, 새교육 운동을 통해 미국식 진보주의 교육의 도입을 강하게 추진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전신인 조선교육연합회의 기관지 ‘새교육’ 창간사에서 그는 ‘우리가 굳게 믿는 새교육 없이는 새 나라가 설 수 없다’고 기고한 바 있다. 그에게 ‘새교육’은 전통적 봉건성과 일제의 군국주의를 극복한, 말 그대로의 ‘새로운’ 교육이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가 믿었던 바의 새교육은 한편으로는 해방 후 한국 주류 교육(학)계에 깊게 뿌리내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스스로가 개방적으로 추구한 이상이기도 했기에 다양한 도전과 대안적 해석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윤미 홍익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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