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는 청년고용 대책을 발표했다. 교원단체와 예비교사들이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명예퇴직(명퇴) 교원을 늘려 청년실업을 해소하겠다는 대책에 관심이 쏠린다. 핵심 내용은 내년부터 2년간 연평균 5500명 수준이던 명퇴교원을 각각 7500명으로 40%씩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만큼 교단을 떠나는 문턱이 낮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교단을 떠나는 문턱이 낮아질 수 있다’고? 그렇다. 필자는 8월말 명예퇴직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지난 2월말 기준인 33년이 안돼 탈락이란 변수가 있긴 하지만”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된 셈이라 할까. 명예퇴직 신청서를 내기 전에 쓴 칼럼 ‘교사 명예퇴직 전부 수용하라’에서 “교육당국은 이미 마음이 떠난 명퇴신청 교사들의 억지춘향식 근무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라 주문했건만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필자로선 최악의 상황이 오고만 것이다. 어쨌든 5,800만 원쯤 되는 명퇴수당을 포기한 채 사표 쓰고 나오는 것은 ‘미친 놈’ 소리 들을 짓이라는게 대체적 평가다. 현실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얘기다. 이를테면 정부의 청년고용 대책이 착실히 진척되길 기다리는 ‘명예퇴직 재수생’ 신세가 되고만 셈이다. 사전 수요조사를
소설가 박범신은 어느 신문 칼럼에서 “사람처럼 영혼의 스펙트럼이 넓은 존재는 없다”(한겨레, 2009.7.11)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영혼은 짐승이 사는 시궁창으로부터 신이 사는 하늘에까지 걸쳐져 있을진대, 어떤 층위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라는 말도 했다. 6년 전 쓴 ‘인간의 도리’란 글의 서두이다. 박범신 글을 읽으면서 인간의 도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교장공모에서 차점자로 탈락하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 쓴 글이었다. 이후 ‘인간의 도리’를 제목으로 하여 산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인간의 도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도리(道理)는, 국어대사전 해석에 따르면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른 길’이다.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른 길은 무엇일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신의를 지키고 염치를 아는 것이 그 으뜸이지 않을까 싶다. 또 받으면 갚을 줄 아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 한다. 인간의 도리가 말로야 쉽지만, 그렇게 만만하거나 호락호락한 것이 아님을 최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하필 환갑을 맞아 그런 경험을 하고보니 새삼 헛되게 산 인생이라는 자책마저 솟구친다. 인간의 도리를 다
2014년 6월 29일 인기리에 막을 내린 KBS대하드라마 ‘정도전’ 이후 사극이 맥을 못추고 있다. 이미 방송된 SBS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 KBS ‘왕의 얼굴’과 ‘징비록’이 ‘정도전’만한 시청률(최고 시청률 19%)을 기록하지 못한 것. 현재 방송중인 MBC ‘화정’도 10% 이하의 대박과는 거리가 먼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과 ‘왕의 얼굴’에 대해선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각 24부작이란 호흡(길이)의 문제와 기본적으로 팩션이란 점에서 ‘징비록’과는 다르다. ‘징비록’은 KBS가 ‘정도전’ 후속으로 야심차게 준비한 50부작 정통사극, ‘광복70년특별기획 대하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하긴 2015년 2월 14일 첫 방송의 ‘징비록’ 시청률은 10.5%였다. 제2의 “‘정도전’이 보인다”커니 “명품 대하드라마의 ‘대박 예감’” 같은 제목의 신문기사를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중앙일간지 등에서 ‘징비록’ ‘관련기사를 거의 내보내지 않은 가운데 출발한 첫 회 시청률이어서 그런 기사들은 그럴 듯했다. 그러나 8월 2일 막을 내린 ‘징비록’ 마지막회 시청률은 12.3%(닐슨코리아 전국기준)다. 최고 13.8%까지 오른 적이 있지
‘쥬라기 공원’이 개봉한 건 1993년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거의 보지 않았다. 1992년 첫 평론집 ‘우리영화 좀 봅시다’를 펴낸 이래 몸소 실천하고 있던 셈이랄까. 나는 뭐 그런 영화평론가였다. 이후 상재한 평론집이 ‘한국영화 씹어먹기’⋅‘한국영화 산책’⋅‘한국영화를 위함’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4권의 평론집을 펴낸 건 1990년대이다. 그러니까 1990년대에 펴낸 4권의 평론집은 한국영화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한국영화의 고사(枯死)라는 악덕환경에서 국수주의자를 자처했으면서도 더러 본 미국영화들이 있다. ‘쥬라기 공원’도 그중 하나이다. 1992년 개봉작 ‘원초적 본능’도 있다. 더러 그런 영화를 본 건 ‘장안의 화제’를 몰고온 위세 때문이라고 해야 옳다. 지금의 CGV 전주관으로 바뀐 피카디리 극장에서 본 ‘쥬라기 공원’은 한 마디로 경악 그 자체였다. 그게 세계 공통이었을까, 40대 후반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쥬라기 공원’은 8억 1970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쥬라기 공원’이 다시 돌아왔다. ‘쥬라기 월드’(감독 콜린 트레보로)가 그것이다. 물론 1997년
오랜만에 ‘군인영화’가 만들어졌다. 메르스 여파로 당초 일정보다 2주 늦은 6월 24일 개봉한 ‘연평해전’(감독 김학순)이 그것이다. 세계 유일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무릇 군인영화는 반공영화였다. 반공이 아니면 정보기관에 불려가 곤욕을 치르던 시절이 있었음은 부인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이 땅의 역사이다. ‘연평해전’ 제작 소식이 알려지면서 집중된 시선도 바로 그 점이었다. ‘연평해전’이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부근에서 발생한 북한군과의 총격전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어서다. 북한군이 적이니 그걸 깨부수는 건 기본적으로 반공영화가 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연평해전’은 궤를 달리 하고 있다. 무조건 애국심만 강요하는 반공영화는 아니란 얘기이다. 우선 ‘연평해전’은 개봉하기까지의 과정이 눈물겹다. ‘26년’⋅‘또 하나의 약속’⋅‘카트’ 등 그런 영화들이 더러 있지만, ‘연평해전’은 크라우드펀딩(다수에게 소액을 투자받는 방식)과 후원금으로 20억 원을 모았다. 이는 순제작비 60억 원(총제작비는 80억 원)의 3분지 1에 달하는 거액이다. ‘연평해전’은 영화가 끝나고 7000여 명의 후원자 이름이 10분 넘게 나오는 ‘장관’이 대미를
또다시 개방형 교장공모 잡음이 불거졌다. 군산기공 교장공모제 공정성을 촉구하는 군산교육 및 시민사회단체(이하 ‘군산교육단체’)가 도교육청을 향해 “공정성 문제가 불거진 군산기계공고의 공모 교장 지원 자격 및 심사 규정을 바로잡으라”고 촉구한 것. 마침내 군산기계공업고등학교의 교장공모는 전면 백지화됐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산기계공고 개방형 교장 공모에 7명이 지원했다. 그중 2명이 현직 학교운영위원과 전북교육청 장학사이다. 일단 장학사는 차치하고라도 1차 심사위원단에 들어가는 학교운영위원의 지원이 개인적 후안무치함만으로 치부될 사안은 아니다. 거기에 1차심사과정에서의 재채점 등 하자가 드러나 아예 공모 자체를 취소한 것. 앞에서 ‘또다시 개방형 교장공모 잡음’이라고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어서다. 도내의 경우 개방형 교장공모가 진행된 곳은 칠보종합고등학교⋅장계공업고등학교⋅군산기계공업고등학교⋅전북기계공업고등학교⋅한국경마축산고등학교⋅줄포자동차공업고등학교 등이다. 이들 학교중에는 2순위자의 문제제기로 공모가 취소되었는가 하면 표절 구설과 함께 금품수수 의혹의 경찰수사까지 받은 곳도 있다. 2개 학
박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로 시끄러운 정국이 이어지고 있다. 여당 원내대표 사퇴문제 등으로 분분한 정치권이지만, 국회법 개정안은 19대 국회 임기와 함께 자동 폐기될게 확실시된다. 정부 시행령의 폐해를 직접 경험한 입장에서 국회법 개정안 폐기는 매우 유감스럽다. 보도에 따르면 전북의 경우 2015년 9월 1일 임용 교장공모 11개 학교의 지원자 수가 24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평균 2.2대 1의 경쟁률에 불과하다. 그마저 개방형공모인 군산기계공고에 7명이 지원한 걸 감안하면 경쟁률은 그 아래이다. 11개중 5개 학교가 각 1명만 지원했다는 것이다. 경기도도 비슷한 사정이다. 전체 49곳 교장공모 학교중 무려 35개 교에서 단 1명만 지원했거나 아예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교과부(지금의 교육부)가 2010년 하반기 초빙형 교장공모를 확대하면서 밝힌 10대 1의 경쟁률이 ‘허언’으로 드러난 셈이다. 명백한 정책 실패의 반증이기도 하다. 하긴 초빙형 교장공모 확대 자체가 ‘꼼수’였다. 2010년 벽두에 터진 서울시 교육청 비리사건이 일파만파 번지자 비리근절 대책의 하나로 내놓은 것이 초빙형 교장공모 50% 확대 실시안이었다. 2007년 참여정부에
영화를 보고 비평하다 보면 참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된다. 다분히 주관적 관점일 수도 있겠으나 터무니 없는 관객 쇄도가 그것이다. 예컨대 천만 클럽에 든 ‘인터스텔라’⋅‘겨울왕국’⋅‘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그런 경우이다. 내가 보기엔 그 영화들은 아무리 좋게 평가하려 해도 천만 관객이 볼 작품이 아니다. 물론 한국영화에도 그런 작품들이 있다. 천만 클럽 영화는 아니지만, 480만 명 넘는 관객 동원으로 다큐영화의 역사를 새로 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흥행대박이 그렇다. 그렇듯 많은 사람이 봐야 할 영화는 아닌데, 참 이상한 일이다. 반면 진짜 많은 사람들 발길이 이어져도 좋을 영화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악의 연대기’(감독 백운학)도 그런 영화중 하나이다. 지난 5월 14일 개봉한 ‘악의 연대기’는, 결론부터 말한다면 좋은 영화, 빼어난 영화이다. 우선 1998년 ‘쉬리’의 조감독 등을 하다 2003년 ‘튜브’로 데뷔한 백운학 감독의 두 번째 영화라는 사실이 놀랍다. 저간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감독이 무려 12년 만에 차기작 연출을 하게
최근 대법원은 두발과 복장의 자유, 체벌금지 등을 담은 전라북도의 학생인권조례가 법령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현재 경기⋅서울⋅광주에서 시행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가 더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지난 3월 도의회 반대에 부딪혔던 강원도교육청이 재추진을 밝힌 상태다. 나는 얼마 전 교원 명예퇴직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2월말 퇴직 기준이었던 33년에서 몇 개월 모자라 8월말 교단을 떠나게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2012년 8월 ‘명퇴 급증, 나도 떠나고 싶다’라는 칼럼을 쓴 후 채 3년을 못버티고 용단을 내린 셈이 됐다. 그 이유를 밝히자니 연전에 쓴 ‘학생들 날뛰게 하는 것이 진보인가’(조선일보, 2010.12.28)라는 칼럼이 먼저 떠오른다. 거기엔 여교사를 성희롱하고, 주먹과 발길질을 예사로 하는 학생들의 반인륜적⋅패륜적 행동 등 학교의 살풍경스런 모습이 적시되어 있다. 그런 교실 붕괴는 경기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이어 서울시교육청이 모든 초⋅중⋅고에서 체벌을 전격 금지한 후 벌어진 일들이라는 것이 그 요지이다. 아울러 소위 진보교육감들의 체벌금지를 포함한 학생인권조례 제정
재작년엔 ‘기쁜 스승의 날을 추억함’, 작년엔 ‘참 우울한 스승의 날’이란 칼럼을 썼다. 제목에서 짐작되듯 기쁜 날과 우울한 날로서의 소감을 각각 밝힌 것이다. 명예퇴직 신청서를 냈으니 어쩌면 재임중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번 제34회 스승의 날은? ‘개념 없는 스승의 날’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기념식마저 취소되었던 지난 해에 비하면 올 스승의 날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현직 대통령이 참석한 사상 처음의 스승의 날 기념식이었으니까. 기념식에선 근정포장 12명, 대통령표창 109명, 교육부장관 표창 5496명 등 5724명의 교원이 정부포상을 받았다. 지난 해 교육부장관 표창 대상자였으되 표창장을 두 달여 늦게 받은 필자로선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축하할 일이지만, 필자 생각엔 일부 면면은 해당 표창 ‘깜’이 안 되는 교원들도 있어 보인다. 하긴 교육부장관 표창의 경우 ‘전입순’이 추천대상임은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다. 필자도 그랬냐고? 아니다. 필자는 특이하게도 제자의 추천으로 장관 표창을 받은 경우이다. 2013년 12월 대통령상인 ‘대한민국인재상’을 수상한 제자가 지도교사였던 필자를 추천한 것이었다. 그럴망정 필자는 다소 못마땅했다.
얼마 전 필자는 ‘그만 떠나라는 학교 분위기’란 칼럼을 쓴 바 있다. “단, 그만 떠나라는 분위기의 학교인지 조금은 더 겪으며 지켜볼 참이다.”라는 단서를 달았는데, 엊그제 그예 명예퇴직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2월말 기준인 33년이 안돼 탈락이란 변수가 있긴 하지만, 이를테면 조금 더 지켜보니 계속 선생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된 셈이다. ‘학생인권 조례 추진 등으로 학생지도가 어려워지고 교권이 추락해서’ 등 ‘교육환경 변화에 따른 어려움’이 교사명퇴의 주요 원인이지만, 지난 해 마침 활성화된 공무원연금 개편과 맞물려 교원 명퇴가 러시를 이룰 때도 필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정년의 그날까지 눈썹 휘날리게 할 일이 있어서였다. 필자의 특기⋅적성교육 지도로 꿈과 끼 살리기 등 빛을 보게될 많은 학생들을 위해서였다. 그랬다. 1년 전엔 그런 희망이 있었다. 충만한 기대감으로 갈수록 심해지는 선생하기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3년 일찍 학교를 떠나려 한다. 이유가 많지만 크게 두 가지만 공개한다. 그에 앞서 미리 당부할 것이 있다. 일부 독자에게 그 내용이 다소 언짢은 것이라해도 ‘전화질’ 따위 ‘무식한 짓’은 없길 바란다. 그들의
2015년 4월 9일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이 마침내 개봉되었다. ‘마침내’라고 한 것은 지난 해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7개월 만에 일반극장 개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같이 상영된 장예모 감독의 ‘5일의 마중’이 한 달 만인 2014년 10월 8일 개봉한 것과 대조적이다. 관람을 서두른 것은 그와 무관치 않다. 아무리 거장의 영화일지라도 관객이 외면하면 1~2주 만에 간판을 내리게 되어서다. 오전 11시 30분 이른 점심을 먹고 조퇴까지 해가며 극장에 갔을 때, 맙소사 관객은 딱 1명이었다. 그러니까 단둘이 그 넓은 객석을 차지한 채 ‘화장’을 본 것이다. 과거 “우리영화 좀 보자”고 외치던 시절엔 흔한 풍경이었지만, 최근 들어 그런 경험은 없었다. 이를테면 거장 감독의 102번째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닌 셈이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비정한 영화시장의 현실인 것을. 영화적으로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보다 더 나은 ‘화장’인데…. ‘화장’의 개봉 2주 관객 수는 13만 4472명이다. 이후 수백 명의 관객 수라 이 수치에서 크게 전진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5일의 마중
“그깟 신문은 봐서 뭐하냐?” 고향 마을에 사는 외삼촌이 어느 해 추석 시니컬한 어조로 내게 한 말이다. 실제로 외삼촌은 어느 신문도 구독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다르다. 중앙지(스포츠신문 포함) 8개, 지방지 5개 등 13개의 신문을 정기 구독하고 있다. 얼마 전 중지시킨 중앙지 2개와 지방지 2개를 합치면 17개 신문을 정기 구독했었다. 13개 신문의 굵은 글씨 제목만을 대략 훑어보는데도 1시간이 넘게 걸린다. 따라서 저녁식사 후 그 신문들을 일별하면서 필요하다 싶은 내용은 따로 챙겨둔다. 뉴스를 볼 시간이 다가와서다. TV 뉴스가 끝나면 비로소 본격적으로 정독에 들어가는 것이 나의 신문보기 습관이다. 내가 남들이 다 놀랄 정도로 13개 신문을 가정에서 정기 구독해 보는 것은, 물론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다. 정치나 사회면도 그렇지만 특히 문화나 교육 분야 기사들이 칼럼 등 글을 쓸 때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터넷 세상이라지만 내게 그것은 딴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이 신문 스크랩 활용만큼 편하지 않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고등학교 교사인 나는 수업외 학교신문 제작지도를 하고 있다. 벌써 14년째 여러 학교에서
아침엔 겨울 낮에는 봄 날씨가 계속되더니 비가 내린다. 참 세월이 빠르다. 다시 3월 5일(음력)이 다가오고 있어서다. 음력 3월 5일은 라대곤 소설가 겸 수필가가 우리 곁을 떠난지 2주기 되는 날이다. 1940년생이니 너무 이른 떠남이 분명하지만, 벌써 2주기를 맞는다. 세월이 참 빠른 것이다. 나는 지난 해 그의 1주기를 맞아 세상에 나온 추모문집《라대곤 문학론》의 엮은이였다.《신곡라대곤문학연구》라는 그의 진갑기념문집을 기획하여 엮어낸지 13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책이다. 그것이 추모문집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지난 연말연시에 있었던 ‘군산예술인의 밤’과 ‘제20회신곡문학상 시상식’ 참석자들이 추모문집《라대곤 문학론》을 받아볼 수 있도록 나름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말할 나위 없이 그 책을 읽으며 고인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을 오롯이 새겼을지는 문인 내지 예술인 각자의 몫이다. 내게는 그 책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사연이 있다. 어쩌면 라대곤 소설가와 나만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꽤 비밀스런, 그런 사연일지도 모르겠다. 20년 전 나는 본의아니게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신호등 없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려던 내 차에 직진중인 오토바이가 달려왔고,
필자는 이미 ‘채만식문학상 부활돼야’와 ‘이제는 미당 시를 가르치려네’ 같은 칼럼을 발표한 바 있다. 소설가 채만식과 시인 서정주는 사후에도 친일행적으로 곤욕을 치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점이 안타깝고 답답하여 그들의 공과(功過)를 있는 그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자는 요지의 칼럼이다.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원조와 아류, 그리고 경중의 차이야 있겠지만 일제침략기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친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살아남은 죄, 침묵한 죄 등 이른바 ‘형이상학의 죄’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 역시 아무렇지 않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부끄러운 역사를 이어왔다. 오래 전 민예총 공동대표,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한 신경림 시인의 “친일과 월북이 문학성 평가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에 공감하는 것도 그래서다. “친일을 했다고 미당 서정주의 작품을 폄훼한다면 과거 정지용을 월북 시인이라고 매도했던 것과 다른 게 뭐냐”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공산주의가 좋다며 스스로 월북하여 김일성정권에서 부수상까지 지낸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 불티나게 팔리고, 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