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진정한 교육적 담론을 찾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직업교육이나 평생교육, 심지어 학교교육에서도 경제적 담론은 차고 넘친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 보니 경제적 담론이 지배적인 현실을 굳이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다면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둘 때 인간의 삶은 지나치게 물질적이며, 피상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인간에게는 실존이 어떤 본질보다도 앞선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볼 때 본질 규정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다양한 삶을 창조하거나 시도하면서 각종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인간이 발전시켜 온 중요한 삶의 양태 중 하나는 바로 교육적 삶이다. 인간은 배우는 사람으로서 성장의 기쁨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성장을 지켜보는 보람을 느끼는 존재이다.
이런 성장의 기쁨과 가르치는 보람은 다른 어떤 가치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진정으로 호모 에듀칸두스(Homo Educandus), 즉 교육적 인간의 특징 또한 지닌다. 2024년에는 우리 사회에서 교육적 인간에 대한 관심이 좀 더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2024년을 시작하는 현재 우리 학교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 교육이 직면한 문제가 인구절벽, ICT 기술 발전, 양극화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2024년에 우리 학교교육은 이런 문제상황 속에서 과제를 찾고, 미래를 전망하면서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상황에 처해 있는 2024년에도 학교교육이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어내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각 문제상황에서 드러나는 교육의 과제와 전망을 살펴보자.
첫째, 우리 학교교육에는 인구절벽이라는 문제가 주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초저출산율은 전 세계적으로 사례 연구감으로 여겨진다. 얼마 전(2023.12.2) 뉴욕타임스는 “대한민국은 사라지는가?”라는 기사를 실었다. 2023년 2·3분기 출산율이 0.7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200명의 인구가 한 세대 후에는 70명으로, 두 세대 후에는 25명으로 줄어든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면서도 뉴욕타임스는 현재 5,100만 명대인 대한민국 인구가 2060년경에는 약 3,500만 명으로 줄어들 것이며, 이는 대한민국에 큰 위기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 기사는 우리나라 초저출산율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교육문제와 저조한 혼외출산율을 들고 있다.
교육이 어떻게 초저출산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뉴욕타임스는 바로 진학을 위한 입시교육(cram school)과 이로 인한 살벌한 학업경쟁(academic competition) 문화를 초저출산율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초저출산율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학교교육은 무엇보다도 세 가지 과제를 우선적으로 풀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어떻게 입시교육과 학업경쟁이라는 살벌한 문화를 진정한 교육적인 문화로 바꿔나갈 것인가? 둘째, 초저출산율로 경제활동인구가 급감하는 상황을 대비하여 어떻게 1인당 높은 생산성을 지닐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을 할 것인가? 셋째, 학생수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소규모학교나 학급에서 어떻게 교육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교육을 할 것인가? 등이다.
2024년에는 우리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 모두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이런 인구절벽 상황과 관련된 문제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했으면 좋겠다.
둘째, 우리 학교교육에는 ICT 기술 발전이라는 문제가 주어져 있다. 챗GPT가 나온 지 겨우 일 년 남짓 지났지만, 챗GPT는 계속 진화를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과 행위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은 컴퓨터(AI)와 대화하기 위해서 컴퓨터 언어(코딩)를 배워야만 했다.
그러나 챗GPT의 등장으로 이런 문법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컴퓨터(AI)가 인간 언어로 인간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코딩능력이 없어도 누구나 컴퓨터(AI)와 대화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챗GPT의 등장으로 인간과 컴퓨터(AI) 역할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컴퓨터(AI)를 활용하여 인간이 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챗GPT 시대에는 인간이 질문하면 컴퓨터(AI)가 대답한다. 컴퓨터(AI)의 대답 능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확해지고 있다.
컴퓨터(AI)는 적응적(adaptive)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인간의 질문이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컴퓨터(AI)의 효용은 극대화된다. 인간이 컴퓨터(AI)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즉 얻고자 하는 답을 잘 얻어내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케빈 켈리(Kevin Kelly)는 <인에비터블>이라는 책에서 “좋은 질문은 정답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 …(중략)… 좋은 질문은 기계가 배우기 매우 어렵고, 좋은 질문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2024년에는 우리 교육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학생에게 정답을 찾는 능력보다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에 대해 고민하며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셋째, 우리 학교교육이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교육 양극화이다. 양극화는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서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세계 최대 PR회사인 에델만 신뢰도 지표조사(Edelman Trust Barometer)가 2023년에 조사하여 발표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양극화 지표에서 ‘매우 심하게 양극화된’ 아르헨티나·콜롬비아·미국 등 6개국에 뒤이어 브라질·멕시코 등과 함께 ‘양극화 위험에 처한’ 국가군에 속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2023년 12월에 발표된 2022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우리나라 학생의 수학성적 점수 차는 38개 OECD 국가 중 가장 컸고, 파트너 국가를 포함하여 총 참여국 81개국 중 두 번째로 점수 차가 컸다. 총인구가 50만 명대인 지중해 섬나라 몰타가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PISA에 참여한 국가 중 우리나라의 수학성적 양극화가 사실상 가장 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포자 아니면 고득점자’라는 수학성적의 양극화로 대표되는 우리 교육의 양극화는 우리 삶의 각종 기회 분배의 토대로 작용하는 교육의 양극화라는 점에서 정치·경제·문화적 양극화, 즉 다른 어떤 양극화보다 더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 2024년에는 우리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 모두 교육 양극화 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했으면 좋겠다.
이에 덧붙여 필자는 2024년에 우리 학교교육에서 관심 갖고 실천하고자 노력하기를 바라는, ‘소소한’ 몇 가지를 얘기하고 싶다. 초등교육에서는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필요한 생활습관을 길러주는 교육이 좀 더 강조되었으면 좋겠다. 예컨대 남의 입장을 배려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의 태도나 자세를 확실하게 길러주는 교육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함께 사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바른 생활습관 교육, 즉 사회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교육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마음을 합했으면 좋겠다. 중등교육에서는 ‘지·덕·체’ 교육을 지향하면서 교과교육을 통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이 강조되면 좋겠다.
남들과 비교하며 경쟁하는 교육보다는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나를, 오늘의 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나를 만들어가는 ‘개인 성장형 교육(Bildung)’이 많아지면 좋겠다. 대학에서는 전통적인 학부·학과체제에서 벗어나 학생 자신이 원하는 진로 또는 직업 관련 교육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그런 교육여건이 마련되면 좋겠다. 2024년에 우리 학교교육에서 이런 바람들이 부분적으로라도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2024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우리 학교교육은 다중의 위기에 처해 있다. 대처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상황들이 우리 교육을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헤치고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방향이나 큰 그림에 대한 논의나 담론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장관급의 초당적 기관인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가 출범했지만, 우리 미래교육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학교 안팎에서 교육 가치에 대한 담론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그 빈자리를 경제 가치에 대한 담론이 채우고 있다. 국가교육을 결정하는 정부 기관, 주요 조직이나 위원회가 점점 경제적 가치 담론과 실천에 익숙한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2024년의 새해와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특히 교육계 안팎에 교육적 가치 담론과 실천이 점점 더 풍성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뿐만 아니라 호모 에듀칸두스(Homo Educandus)도 차고 넘쳤으면 좋겠다. 2024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모두 새로운 희망을 갖자. 교육에 대한 거대 담론을 생산해 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교육 일상에서 소소한 교육적 가치 담론과 실천을 함께 찾아봤으면 좋겠다.
새교육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