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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위한 마음 챙김 철학] “하찮아져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교사는 감정노동이 심한 직업이다. 교실에서 날이 선 말투,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아이가 한 명만 있어도 온종일 마음이 편치 않다. 퇴근하면서 걱정을 학교에 놓고 나오기도 쉽지 않다. 내일 수업 고민, 처리해야 할 업무 등등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탓이다. 그래서 학년 마무리인 12월쯤 되면 선생님의 마음은 너덜너덜해진다.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교무실은 벌써 내년도 학교 이동, 부서 배치, 담임 배정 등으로 술렁거린다. 가슴 한편에는 체념과 실망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어차피 나는 또 인정 못 받을 거다. 올해의 고생이 내년의 고통으로 이어지겠지. 나의 처지를 배려해 줄 여건도 안 되고, 힘든 업무와 학생 지도를 피할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래서 연말, 송년회 모임은 상처로 다가온다. 학교 다닐 때 나는 모범생이었고 공부도 잘했다. 이제는 학창시절 뒤처졌던 동창들이 더 잘나가고 행복한 듯싶다. 힘들다고 푸념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안정된 데다 방학까지 있는 선생님이 뭐가 힘들다 그래?”라는 질책(?)만 되돌아 뿐임을 잘 아는 탓이다. 이럴수록 명예퇴직과 이직을 꿈꾸는 일도 잦아진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매일 해낸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1969~)은 이런 아픔으로 어깨 처진 선생님들께 위로를 건네는 철학자다. 그라면 이렇게 말해줄 듯싶다. 


“아이들이 말 안 들어 속상하시다고요? 수업시간에 산만해서 너무 힘드시다고요? 아니에요, 선생님! 말 잘 듣고 설명 잘 듣는 것이 더 이상한 거예요!” 

 

1만 년 전 숲속을 뛰어다니며 사냥하던 인류나 지금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나 똑같은 호모 사피엔스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를 한 시간 가까이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게 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매일 거듭하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알랭 드 보통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어찌어찌 예의 바르게 굴고,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고 타협하고 타인의 관점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진화의 역사가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현재 모습보다 더 엉망이어야 한다.”
 
야생성을 없애고 문명화시키는 작업은 오랜 길들임의 연속이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가, 교실이 당장 달라질 리 없다. 그래도 속 썩이던 옛 제자들을 생각해 보라. 대부분은 어른이 되어 그럭저럭 잘 살아간다. 우리는 아이들이 반항과 틀어짐을 겪고, 반성하며, 스스로 사회인으로 거듭나도록 버티며 견뎌주었다. 선생님의 감정노동은 충분히 가치 있고, 보람찬 일이다.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헛헛하다. 교직의 인기는 날로 떨어진다. 자꾸만 친구들과 자신을 견주게 되며, 뒤처지고 초라해지는 듯한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 알랭 드 보통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그럴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는 우리 탓이 아니라, 현대 문명 자체가 ‘질병’인 까닭이다. 무슨 말일까?


귀를 막으라. 하다못해 ‘덜’ 들으라
17세기에 양치는 목동이 루이 14세와 자신을 견주며 한숨 쉬지 않았다. 아예 신분이 달랐을뿐더러, 양치기가 왕을 볼 일도, 처지를 비교해 볼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사회에는 비교와 자책이 일상이다. SNS에서는 온갖 멋지고 잘나가는 모습이 넘쳐 나지 않던가. 언론에서는 보기 싫어도 재벌과 유명인의 일상을 끊임없이 알려준다. 이런 처지에서는 멀쩡히 잘 사는 사람도 자기 삶이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게다가 인터넷 기사를 짬짬이 들여다보는 일은 온종일 자신을 ‘공포의 강물에 목을 적시’는 짓과 같다. 학교폭력과 교권추락에 대한 소식이 하루도 들리지 않던 날이 얼마나 되던가. 우리 기분은 더욱 가라앉는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은 실제 현실은 꼭 이렇지만은 않다고 우리를 다독인다. 

 

“신문은 대부분 사람이 친절하다는 사실을, 기차는 대부분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정부에서도 감동적이고 훌륭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날은 조용히 별일 없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중략)…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뉴스는 용서하고, 반성하고, 음미하고, 감사하고, 고용하고, 친절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뉴스다.”

    
학교 일상도 웃음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착하고 성실하고 예쁜 아이들이 심장을 뛰게 하는 친구들보다 훨씬 많다. 문제가 도드라지는 이유는 평온한 나날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귀를 막으라고, 하다못해 ‘좀 덜 들으라고’ 조언한다. 언론에서 나오는 사건은 일상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거나 드물게 벌어진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심각한 상황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학교의 일상은 줄곧 평화롭고 따뜻하다. 이런 하루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덜 돋보이고 덜 우러름 받는 곳에서 많은 이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선생님들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시는 분들이다. 누구와 비교하며 주눅 들 일이 결코 아니다. 스승의 날, 고마움을 전하는 숱한 이들을 떠올려 보라. 교사는 무척 보람차고 의미 깊은 직업이다. 

 

하찮아지는 연습하기
그렇지만 복닥거리는 일상에서는 이런 위안이 별 도움이 안 된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는 무척 아프다. 몸의 다른 곳이 모두 멀쩡해도 그렇다. 속 끓이는 아이나 상황이 하나만 있어도 지금까지의 위로는 금세 날아가 버릴 터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우리에게 ‘하찮아지는 연습’을 권한다. 


공원을 산책하다 청둥오리를 만났다고 해보자. 오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심이 없다. 묵은 빵을 던지는 이가 권력자인지 거지인지, 멋진지 추레한지는 오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맛있게 받아먹을 뿐이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내 눈앞의 문제는 우주의 운명이 걸린 듯 심각해 보인다. 그렇지만 한 발 떨어져 숨을 고르면, 사실 대수롭지 않다. 내 문제가 어떻건 청둥오리는 연못을 평화롭게 거닐고, 길거리 고양이는 햇볕을 즐긴다. 내 앞의 상황이 뒤틀리고 꼬여도 세상은 별 탈 없이 굴러간다. 그러니 너무 애면글면할 필요 없다. 우리가 자연을 보며 종종 숨을 골라야 하는 이유다. 


나아가, 종종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머리 위에 펼쳐진 공간의 끝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빛의 속도로 수천 년을 달려도 끝이 나지 않을 크기다. 우주의 역사는 또 어떠한가. 이에 견주면 나의 삶, 나의 문제는 너무나 하찮다. 이런 깨달음은 마음에 평화를 안긴다. 결국은 다 지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깨끗하게 잊힐 터다. 


경기가 격해질 때면 감독은 ‘작전 타임’을 외친다. 멈춰서서 숨을 고르면 상황이 객관적으로 정리되는 까닭이다.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가 갈래 잡힌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주 우주의 관점과 역사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12월, 곧 방학이다. 겨울방학은 선생님에게 작전 타임과 같은 시기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셨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별처럼 빛났던 일도, 나락까지 떨어졌던 아픔도 결국은 흘러가고 사라지게 되어 있다. 우주의 눈으로 보면 모든 일은 그냥 스쳐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깨달음과 재충전이 있는 방학 되시기를 바란다.

‘선생님을 위한 마음챙김 철학’ 연재를 종료합니다. 그동안 따뜻하게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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