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7 (목)

  • 흐림동두천 11.5℃
  • 흐림강릉 7.9℃
  • 흐림서울 13.6℃
  • 대전 17.7℃
  • 구름많음대구 23.2℃
  • 구름많음울산 21.2℃
  • 흐림광주 19.8℃
  • 부산 16.9℃
  • 흐림고창 16.3℃
  • 흐림제주 20.9℃
  • 흐림강화 13.5℃
  • 흐림보은 17.7℃
  • 흐림금산 19.1℃
  • 흐림강진군 17.5℃
  • 구름많음경주시 22.9℃
  • 구름많음거제 17.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문화·탐방

경원선(京元線)타고 떠나는 연천 여행

-경기 북부 문화/역사 탐방 이야기(2)-

연천을 가로지르는 경원선(京元線)은 서울-원산(元山)을 잇는 철도로 길이 223.7㎞이며 1914년 9월 16일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오늘날에는 국토 분단으로 용산역~백마고지역 사이의 94.4㎞만 운행되고 있다. 용산에서 출발하여 서울 북부지역 – 의정부 – 동두천 - 소요산을 지나 연천군의 첫 역인 초성리역에 진입한다. 이후 한탄강, 전곡, 연천, 신망리, 대광리, 신탄리, 백마고지역까지가 경원선의 연천 구간이다. 경원선이 지나가는 간이역을 따라 연천 여행을 해보았다. 연천군의 주요 지역들을 지나는 역들이다. 전곡역, 연천역은 2023년 신축된 현대식 역사가 오래되고 낡은 간이역 건물을 대신하고 있다. 전곡읍까지만 주로 갔었던 터라 이전에는 소요산역에서 전철을 내려 버스로 갈아탔다. 소요산역에서 전곡이나 연천까지 가는 기차는 그 간격이 너무 길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승객이 거의 없다.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산야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시간이 기억난다.

 

8월의 어느 날, 연천에서 군 생활을 했던 40년 지기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서울에 살다가 강원도 원주로 이사를 간 이후 1년에 한 번을 보기도 빠듯하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이 친구와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예전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냥 억지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추억을 재생시킨다. 난 이 친구를 ‘흑백영화의 낡은 필름’이라고 표현한다. 참 소중한 녀석이다. 어느덧 우리는 사춘기 시절의 어린아이로 변해있다. 너무나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경원선을 따라 연천을 여행했다.

 

첫 번째 청산역(옛 초성리역) / 한탄강역

용산에서 출발한 경원선은 초성리를 지나 연천과 신탄리를 거쳐 대광리역, 백마고지역으로 이르게 된다. 물론 종착역은 북한의 원산이다. 청산역(초성리역)은 현재 폐역이다. 청산역(초성리역) 주변의 마을인 초성리는 오래된 옛 모습을 여전히 담고 있다.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한눈에 보아도 3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아니 훨씬 더 오래전 느낌의 간판들이 많이 걸려있다.

 

또, 주변의 학담마을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오래전 모습들이 잘 간직되어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학담마을의 고즈넉한 풍경들은 옛 추억을 자연스럽게 소환한다. 초성리 바로 인근에는 ‘열두개울’이라는 유원지가 있다. 연천군의 남단, 초입에 자리 잡은 ‘열두개울’은 서울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 여름철에 많은 인파가 몰린다. 이곳에 다리가 놓이기 전, 열두 개의 개천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계곡이 크지는 않지만, 물이 깊지 않아 어린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안전하다. 닭백숙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대학 시절만 하더라도 기차를 타고 한탄강역을 지나 전곡역에 도착했었다. 한탄강역은 한탄강 유원지 바로 옆에 있다. 승용차가 드물었을 당시 한탄강 유원지에 오려면 경원선을 타고 이 한탄강역에서 하차해야 했다.

 

연천행 시외버스도 한탄강 유원지에 잠시 정차한 후에 전곡까지 운행했었던 기억이 난다. 한탄대교를 건너자마자 한탄강역에 기차는 잠시 머문다. 별도의 건물이 없고 기차가 정차하고 승객들이 승하차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두 번째 전곡역

경원선은 초성리역-한탄강역-전곡역-연천역-신탄리역으로 이어져 백마고지역에서 멈춘다. 조그마한 각각의 역마다 그들만의 소중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 중, 전곡역은 1912년 7월 25일 경원선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1945년 광복과 남북분단 당시 소련군이 들어와 있던 38선 이북 지역의 최남단 역사(驛舍)이다(나무위키).

 

전곡역은 전곡의 중심이 되던 곳이다. 전곡 버스터미널보다 훨씬 많은 승객이 이용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곡역은 전곡초등학교와도 멀지 않아 학교 공부가 끝나면 역사(驛舍) 인근에서 철길을 뛰어다니며 위험하게 놀았다. 전곡역 앞에는 군용 트럭이 주차된 조그만 공터가 있었다. 휴가가 끝나고 자대로 복귀하는 장병들의 얼굴이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그때 본 군인(아저씨)들은 나처럼 어린 초등학생에게는 덩치가 크고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동두천중앙역에서 신탄리 방향 열차를 타면 전곡역에 갈 수 있다. 캄캄한 서울의 지하철에서 벗어나 탁 트인 주변 경관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야트막한 언덕 사이로 군데군데 큰 산이 있고 자그만 개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창밖의 풍경을 보며 상념에 빠져있노라면 어느새 한탄강역이 보인다. 한탄강역은 무인(無人)으로 운행되는 오래된 역이다. 한탄대교와 북위 38도선 표지판을 보며 한탄강역을 지나면 얼마 가지 않아 전곡역에 바로 도착할 수 있다.

 

 

전곡역 앞의 M 식당은 전곡에서는 매우 유명한 중화요리 음식점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서 데리고 가셨던 곳이다. 모처럼 전곡 읍내의 시장에 나오신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셔서 나와 동생을 데리고 이 음식점에서 자장면을 사주셨다. 이때 먹은 자장면은 내 평생 어떤 자장면보다 맛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자장면이 아직도 기억난다. 당시 자장면 가격은 400원이었다. 2000년대 초반 어떤 그룹(가수)이 불렀던 노래, 「어머님께」에 등장하는 자장면에 대한 가사가 가슴을 저민다.

 

‘어머니’와 ‘자장면’을 연결해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기가 막히게 감정을 자극하는 문장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품게 해 주었던 노래였다. 현재는 당시 주인의 며느리께서 식당을 경영하고 계신다. 전곡을 갈 때면 항상 그곳에서 식사했다. 아직도 음식이 유난히 맛있다. 특히 쫄깃한 탕수육이 정말 참맛이다.

 

전곡초등학교는 전곡역 인근,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필자는 1980년 늦가을 서울에서 이곳 전곡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한 학년에 5~6개 정도의 학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전곡읍은 연천군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동시에, 가장 큰 읍이다. 아무래도 동두천, 의정부, 서울과 가까운 곳이다 보니 군인 가족뿐 아니라 다수의 인구가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전곡읍은 군사 도시이다. 군부대와 군인을 대상으로 하여 마을의 경제활동, 사회활동 등이 대부분 이루어진다. 학교의 운동회 때에도 군 장병들이 와서 천막도 쳐주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해 주었다. 그리고 각종 음식점, 상점, 숙박업소 등의 고객 대부분이 군부대의 군인 또는 군인 가족들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위수지역(衛戍地域)은 한탄강 유원지 부근이었다. 따라서 외출, 외박을 나온 군 장병들은 전곡읍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전곡 읍내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만 했다. 아마 이 무렵이 경제적으로 가장 번화하였을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23년 7월 현재 연천군의 인구는 4만1000여 명이며 이 중 전곡읍의 인구는 1만8000여 명이다. 1980년 당시 연천군의 인구는 6만7000여 명이었다. 1980년을 기점으로 연천군의 인구는 차츰 줄어든다.

 

전곡초등학교에 처음 전학 갔을 때, 군인 가족이라는 이유로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무척이나 반겨주었다. 난 서울에서는 학급에서 친구들에게 주목받은 적이 없다. 공부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운동을 잘한 것도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과 같은 반 친구들조차 내가 그 학급에 있었다는 것도 잘 모를 정도로 내향적이었다.

 

전곡초등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타인으로부터의 관심을 받는 경험을 했다. 군인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담임 선생님께서도 나를 살갑게 대해주셨고 친구들도 나와 함께 놀려고 다가오곤 하였다. 난 조금씩 바뀌어 갔다. 학교생활이 재미있었고 자신감도 차츰 생겨났다. 학급 임원을 하면서 여러 가지 학급 일에 영향을 미치곤 했다. 공부도 잘되었다. 성적도 많이 오르고 우등상장을 받아 부모님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그 무렵에 학생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알겠지만, 우리 반에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소설의 ‘엄석대’와 같은 학생도 있었다. 그 친구는 부하(?)를 몇 명씩 거느리고 다녔고 가방과 신발주머니는 그 친구들이 대신 들고 다녔다. 반항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부하들을 시켜서 때리는 것을 몇 번 목격하였다. 그들이 보기 싫었고 증오했다. 어른이 되어 우연히 본 그 소설에서 그 기억이 데자뷰(Dejavu) 되었다. 당시 많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전곡초등학교 뒤편, 차탄천 쪽에는 현무암과 이름 모를 나무가 무성하고 외진 장소가 있었다. 학교와는 별도의 출입문 없이 운동장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무가 크고 울창하고 현무암이 어두운색을 띠고 있어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은 무서웠다.

 

어느 날이었다. 우리 반 친구가 다른 반의 학생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야외학습장에서 정체 모를 귀신을 본 이야기였다. 어느 학교건 ‘학교 괴담’ 하나쯤은 있을 터이다. 아마 전곡초등학교에는 그 이야기가 ‘학교 괴담’으로 전해 내려올 것이다. 손발이 없고 검은 옷차림과 검은 모자를 쓴 중년의 아저씨가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아저씨의 손이 있던 자리에 지팡이가 둥둥 떠 있고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는데 얼굴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발도 없는데 천천히 걷다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멀리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가를 반복한다고 말했다. 1980년대 초반 전곡초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아마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치열한 전쟁으로 많은 억울한 희생자들이 죽어간 자리가 아니었을까?

 

물론 어린아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한 편으로는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하여 숭고하게 희생한 호국영령의 넋이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당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나 무서웠다. 지금 전곡초등학교 학생들도 그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학교 주변에 주차하고 전곡초등학교에 잠시 들어가 보았다. 10여 년 전에 혼자 이곳에 들어와 벤치에 앉았던 생각이 났다. 운동장 끝에서 학교 전체를 살펴보니 40년 전 전곡초등학교의 모습이 한눈에 그려졌다. 본관 건물은 1층짜리 낮은 건물이었고 본관 뒤편 후관은 3~4층 정도 되는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운동장 건너편은 콘크리트로 만든 스탠드가 계단식으로 길쭉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연천군 내 초등학교 대항 축구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우리는 운동장의 계단에 앉아서 전곡초등학교 선수들을 응원했다. 그때의 환호성과 축구 선수들의 뛰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40년, 정확히는 44년째이다. 내가 이곳에서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공을 차면서 놀던 때가, 난 어느 순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어째서 44년 전의 일을 이토록 정확하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냥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스틸사진처럼 그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우리 뇌는 가장 안 좋은 기억과 가장 좋았던 기억을 제일 오랫동안 저장한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전곡초등학교에서의 그 시간은 내 머릿속에 너무나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일까?

 

세 번째 연천역

연천역 앞의 도로는 확장되어 어지간한 대도시의 그것과 비슷한 최신식 형태를 갖췄다. 역을 중앙에 두고 대로가 펼쳐지며 좌우로도 큰 도로가 있는 모양새다. 예전보다 큰 도로와 건물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주말 오후인데도 왕래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군 장병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연천역이라 하면, 연천군을 대표하는 역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연천군에 인구가 많이 유입되도록 여러 가지 정책을 펴는 모양이나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여하튼 연천역 앞에는 예나 지금이나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연천역 바로 옆에는 연천역 급수탑이 있다. 웅장하다. 연천역 급수탑은 길게 뻗은 원통형으로 생겨 마치 등대나 굴뚝같다. 23m의 높이를 자랑하는 급수탑 내부, 출입구 반대편에 계기 조작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급수관 3개와 기계장치가 보존되어 있다. 연천역 급수탑은 경원선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14년에 만들어졌으며 2003년 국가등록 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상자형과 원통형 2기가 남아있다. 상자형 급수탑은 콘크리트조로 기단, 벽체부, 지붕부 3단으로 입면을 형성하였으며, 아치형 출입구를 두었고, 외관에 줄눈을 그려 벽돌로 쌓은 것처럼 꾸몄다. 원통형 급수탑에는 급수관 3개와 기계장치가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고, 탑 외부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밤이면 급수탑 벽면에 예쁜 조명이 켜진다.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여 제 기능을 다하고 사라졌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증기기관차 관련 철도 시설물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연천역 등 모든 경원선 기차역에는 차탄천이 함께 흐른다. 철로를 따라 흐르는 차탄천은 색다른 묘미를 준다. 경원선과 차탄천은 마치 평행선처럼 긴 세월을 함께 머금고 달린다.

 

연천역 바로 인근에는 여름철 유명한 관광지인 동막계곡 즉, 동막골 유원지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동막골 유원지는 연천을 대표하는 유원지이다. 특히 여름철이면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연천향교와 연천 현충탑을 볼 수 있다. 연천향교는 1398년(태조 7년)에 처음 설립한 향교로 본래 읍내리에 있었으나, 1658년(효종 9년)에 한 번 이전되었다.

 

연천향교 바로 아래쪽 명륜(明倫) 교육관에 잠시 주차하고 홍살문(紅箭門)을 지나니 연천향교가 있었다. 현재는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해 외관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농로를 따라가면 차탄천 개울 바로 앞에서 현충탑 입구가 보인다. 곳곳에 대전차방어 진지가 보인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으나 연천지역 곳곳에서 볼 수 있어 어느덧 익숙해져 버렸다. 전차의 이동을 지연시키고자 거대한 콘크리트로 만든 군사시설이다.

 

연천 현충탑은 국가보훈처(現 국가보훈부)지정 현충 시설로서 육군 제17연대가 1950년 12월 17일부터 1951년 3월 15일까지 연천지구 전투에서 이룩한 장병의 공훈을 높이 찬양하고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산화한 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묵념을 올렸다.

 

누군가는 지금의 평화를 ‘피를 먹고 얻어지는 평화’라는 말로 표현했다. 어쩌면 6월 25일을 매년 기리는 일이 없어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벌써 70년 전의 일이다. 세대가 2번이나 바뀌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들에게는 역사책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지를. 연천 곳곳에 자리 잡은 현충탑과 전적비, 위령비는 왜 지금의 우리가 평화롭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다.

 

그리팅맨(Greeting man)을 보러 가는 길에는 두루미 마을 간판이 보인다. 연천은 콩과 율무, 그리고 두루미 등으로 유명하다. 연천을 다니다 보면 콩으로 만든 여러 가지 요리 즉, 두부 요리나 콩국수 등을 파는 음식점이 자주 보인다. 율무 또한 연천군의 농특산물이다. 매년 10월이면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율무 축제가 개최된다.

 

몇 해 전, KBS ‘동네 한 바퀴’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떤 주민이 두루미에게 율무를 먹이로 주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연천군 중면 횡산리 일대 ‘임진강 두루미류 도래지’는 국제적으로 희귀한 조류인 두루미와 재두루미 1500여 마리가 매년 겨울 월동하는 곳이다. 두루미들은 임진강과 주변 여울, 농경지에서 먹이를 구하고 휴식을 취하며 겨울을 난다. 이 일대 두루미들은 특이하게 산기슭에 심어있는 '율무' 낙곡(落穀)을 먹어 '율무 두루미'라고 불린다.

 

그리팅맨은 옥녀봉 정상에서 북쪽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존중, 배려, 그리고 통일을 바라는 마음이 함께 저며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벙커 건물은 그리팅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좁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5분 정도만 올라가면 그리팅맨이 바로 시야에 들어온다.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연천 9경 중 하나인 그리팅맨(Greeting man)은 유영호 작가가 만든 조각상이다. 2016년 4월에 설치하였다. 조각상은 15도 각도로 고개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서로에 대한 배려, 존중, 평화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옥녀봉은 해발 205m로 연천군 거의 모든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네 번째 신망리역/대광리역/신탄리역

경원선의 간이역을 방문했던 날은 오전에는 더웠다가 오후가 되자 갑자기 흐려지면서 비가 내렸다. 여름내 폭염이 지나간 자리를 말끔하게 청소라도 하듯이 차분히 비가 내렸다. 어둡고 탁한 연천의 하늘은 분단의 아픔을 노래하듯이 간이역 주변을 무채색 수채화로 물들였다.

 

‘간이역(簡易驛)’은 레트로(Retro) 감성 최고의 아이템이다. 일단 간이역은 대부분 오래된 건물이다. 특히 폐 간이역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간이역 주변의 모습들 또한 간이역과 마찬가지로 오래전 풍경을 간직하고 있을 때가 많다. 간이역에 가면 지금은 사라진 그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겨난다. 경원선의 간이역도 마찬가지이다. 역 주변에는 오래된 상점의 낡은 간판과 지금은 사라진 표지판 등이 아직 철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오래된 것은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오래된 것, 낡은 것이 새롭게 생겨난 것들보다 훨씬 소중해 보이고 눈길이 자꾸 머문다.

 

경원선 간이역은 이미 폐역이 되었다. 2023년 하반기 새로운 청사(廳舍)가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낡은 폐역 옆에 근사하게 지어진 신(新)청사는 옛날과 오늘날의 모습을 대표하듯이 나란히 서 있다. 폐역이 철거되지 않고 계속 남아 예전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신망리역 부근은 건축 기자재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간이역이 버려진 듯하여 안타까우면서도 세월의 무상함이 함께 느껴졌다.

 

경원선이 원산까지 이어지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이미 지나버린 70년을 거슬러 올라 경원선 증기기관차가 마음껏 달리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신망리역 주변에는 ‘평화누리길’과 ‘평화누리 자전거길’이 지나간다. 신망리역 주변의 대표적인 콘텐츠는 바로 다방 거리이다. 지금은 온갖 외국기업 카페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지만 필자의 젊은 시절만 해도 친구와 편하게 차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은 다방과 빵집밖에 없었다. 다방이라는 이름이 자칫 부정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으나 사실이 그랬다. 특히 연천군은 군부대가 많아 다방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메리카노가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역시 우리에겐 설탕과 커피 프림이 적당히 들어간 다방 커피가 최고다. 오늘은 식후에 달콤한 자판기 커피로 옛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대광리역은 1912년에 영업을 시작한 기차역으로 연천의 경원선 기차역 중 가장 오래된 역이다. 지난 2019년에 전철화 사업으로 인해 운행이 중단되었다. 역 앞에는 큰 군용물품 상점이 자리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필자도 옛 시절을 생각하며 상점에 들어가 구경을 해보았다. 대광리역 주변에는 드문드문 오래된 가게 간판과 현대식 간판들이 상존한다. 그리고 바로 인근에 군부대가 있다. 그래도 대광리역 주변은 생각보다 사람의 왕래가 꽤 있었다.

 

신탄리역은 2012년 백마고지역이 신설되기 전까지 지난 60년간 경원선의 최북단 종착역이었다. 여느 경원선 역과 마찬가지로 차탄천이 바로 옆에 흐르고 있다.

 

 

과거, 고대산의 풍부한 임산자원을 목재와 숯으로 가공해 생계를 유지했던 마을이기에 이름도 신탄(新炭)리가 되었다고 한다. 신탄리는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북한에 귀속되었다가 1951년 수복된 지역이다. 대광리역에 비하여 주변에 음식점, 상점 등이 많은 편이고 고대산과 연계하여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노력이 군데군데 보였다.

 

주변에는 고대산이 있다. 고대산의 정상에 오르면 북한 땅을 볼 수 있어 실향민들이 찾는 곳이다. 신탄리는 ‘통일을 고대하는 마을’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고대산에는 큰 규모의 자연휴양림이 있다.

 

신탄리역은 연천군에 있는 경원선 역 중, 백마고지 다음으로 북단에 있다. 북한과는 매우 가깝다는 이야기다. 다른 역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분단의 아픔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신탄리역 철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보았다. 이 철로를 따라가면 경원선의 끝인 원산까지 갈 수 있다. 단순히 원산을 향한다는 것보다는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통일의 길이 아련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오래되어 부식된 표지판이 세월의 흔적과 분단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준다. 신탄리역에서 자동차를 이용하여 이 표지판 바로 옆까지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철로를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듯하다. 신탄리 역사(驛舍)에서 그리 멀지 않다.

 

 

신탄리역에서 북쪽으로 철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경원선 폐(廢)터널을 만나게 된다. 이 터널은 북한의 원산까지 연결된 경원선 철로의 일부였지만, 1945년 해방 이후 철길이 끊어지면서 버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폐 터널의 입구에는 바닥에서 위로 솟아오른 형태를 한 역고드름이 있다. 지금은 여름철이라 고드름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조금 더 살펴보았다. 이 폐터널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탄약 창고로 사용됐는데 미군이 이 터널을 폭격했고, 그 폭격으로 인해 터널 위쪽에 생긴 틈과 함께 자연현상이 우연히 맞물리면서 역고드름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역고드름 터널 입구에는 연천 급수탑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총탄 흔적이 있다. 하지만 급수탑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컸다. 아마 비행기에서 쏜 총탄으로 보였다. 거의 성인의 주먹 크기 정도의 탄환 자국이 수십 개가 넘게 눈에 들어온다. 역고드름 또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상흔이다. 연천군 관광 지도에는 ‘연천 역고드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곳은 연천의 가장 끝이다. 몇 걸음만 더 가면 강원도 철원 땅이다. 신탄리에 오면 꼭 들러주길 바란다.

 

 

경원선은 연천군을 세로로 가로지른다. 경원선의 여러 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관광하면 빠지는 곳 없이 자세히 둘러볼 수 있다. 경원선 열차를 타고 원산까지 멈춤 없이 한 번에 갈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