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군은 화산지대였다. 그래서 현무암을 어느 곳에서든 쉽게 볼 수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을 처음 보았을 때는 너무 신기했다. 우리나라 전체에서 제주도 이외에 이렇게 흔하게 현무암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에 또 있을까?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한탄강과 임진강 주변으로는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정착해서 삶의 터전을 이루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부족을 이루고 또 자연스럽게 권력자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들이 무덤인 고인돌(지석묘)이 연천군 곳곳에서 발견된다. 또한 용암, 화산지대가 만들어낸 거대한 바위의 형상은 장관을 이룬다. 임진강과 한탄강을 타고 흐르던 용암은 굳어서 거대한 절벽을 형성했다.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절경이다.
○좌상바위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 시인이 했던 말이다. 그는 시인 로스께의 말을 인용하며 “늙는다는 것은 이제까지 입어 본 적이 없는 납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늙어가는 것이다. 늙어가는 것은 ‘상실의 벌’ 일지도 모른다. ‘벌’은 슬픈 것도 아픈 것도 아니다. 그냥 감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 늙어가는 것은 그냥 벌일 뿐이다. 슬퍼하거나 분노할 필요도 없다.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슬퍼질 때가 있었다. 늙어 가는 것, 어쩌면 그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과 옷차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가 하나씩 더해진다. 그래서 납으로 된 옷을 입는다고 표현했을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의 나이는 어느덧 25년 전의 시간이 되어 버렸다. 잠시 눈 감았다 다시 뜨니 25년이 지나가 버린 느낌이다. 삶은 크고 작은 파도가 되어 우리에게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든다. 파도를 헤치는 법을 알고 싶은데 녹록치 않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 배웠던 방법도,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알게 되었던 방법도 잘 통하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나이가 들면 저절로 사는 방법을 터득할 것이라 믿었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부딪치는 크고 작은 파도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하나의 파도를 넘으면 이내 더 큰 파도가 나를 덮친다.
고려시대 국사인 지눌은 “땅에서 넘어진 자(人因地而倒者), 땅을 딛고 일어나라(因地而起)”고 말했다. 수 백 년전의 진리는 현재, 아니 앞으로의 미래에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터이다. 넘어진 곳을 그대로 딛어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일어서야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낼 수 있다. 그래야 또 걸을 수 있다. 넘어졌다 일어서 본 사람만이 넘어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넘어져 봐야 나에게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다. 파도가 덮치건 넘어지건 어찌어찌라도 버티며 사는 게 인생이다.
한 곳에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크나큰 바위는 늙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희석시켜 준다. 같은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는 것이 그토록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좌상바위는 재인폭포에서 6~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자동차로 약 15분이면 닿을 수 있다. 좌상바위 주변 한탄강은 수심이 얕고 물살이 빨라 견지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주차장에서 200m를 도보로 이동하면 좌상바위를 마주하게 된다. 실제로 걸을 때에는 조금은 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통행로가 잘 가꾸어져 있고 평탄하기 때문에 접근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이 곳에 닿으면 탁 트인 한탄강이 보인다.
약 10여분 걷고 나서 마주한 좌상바위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바위가 아니라 산에 가까울 정도로 규모가 크다. 바위라는 명칭 때문에 자칫 조그만 바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름만 바위이지 훨씬 거대하다. 절벽을 만들며 우뚝 서서 한탄강을 여유롭게 내려다보고 있는 좌상바위의 위엄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좌상바위의 아래는 한탄강의 세찬 물살이 굉음을 내며 휘감고 흐르고 있다. 물속에 들어가서 낚시를 하기에는 조금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탄강의 바닥은 대부분 울퉁불퉁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어느 곳이 깊은지 얕은지 가늠하기 어렵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딛어도 깊은 웅덩이가 있을 수 있다.
어릴 적 여름 휴가철이면 사망사고가 많이 났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어느 선생님께서 여름방학을 앞두고는 한탄강에서는 특히 조심해서 물놀이를 해야 한다는 당부를 들으며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좌상바위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 한탄강 주변에 위치하는 약 60m 높이의 불뚝 솟아있는 바위로 중생대 백악기 말에 화산활동으로 분출한 용암이 굳으면서 형성된 현무암 바위산이다. 좌상바위의 재질은 제주도의 현무암과 다르게 응회암질 퇴적 현무암으로 다양한 크기의 화산자갈이 포함되어 있어 화구나 화도 부근에 용암이 퇴적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두산백과 두피디아).
좌상바위는 오랜 기간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왔다. 신선이 노닐던 바위라고 하여 선봉 바위, 풀무 모양을 하였다 하여 또는 그 곳에서 풀무질을 하였다 하여 풀무산, 스님이 앉아 있는 모양이라 하여 좌살바위, 한국전쟁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하여 자살바위 등등. 그러나 어떤 이름보다도 현재 좌상바위가 위치하고 있는 청산면 일원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고 있는 것은 ‘좌상바위’이다(연천문화원).
○ 아우라지 베개용암
오랜 세월 변함없이 같은 곳을 지키고 있는 무언가는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그래, 어쩌면 그 곳은 우리가 반드시 찾아가야 할 자리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 거의 매일 친구들과 함께 했던 오징어 게임도 지금은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신기한 퍼포먼스가 되었다. 컴퓨터, 모바일 게임에만 익숙한 MZ세대 세대에게 예전의 놀이 들은 낯설고 신기할 뿐이다. 당시 우리에게 유행했던 취미활동은 우표수집이었다. 오래될수록 가치를 인정해 주었고 희귀할수록 더 가치가 올라간다. 기념우표가 발행되는 날이면 우체국 앞에 새벽부터 줄을 서며 기다렸다. 심지어 텐트를 치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얻게 된 우표를 보며 뿌듯한 기분을 느꼈고 친구들에게도 자랑할 수 있었다.
필자는 서울에서의 중고교 시절에도 전곡읍의 친구들과 손편지를 주고 받았다. 손편지라는 말도 최근에야 생긴 말이다. 편지는 당연히 손으로만 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버튼 몇 번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밤새 마음을 꾹꾹 눌러쓴 서툰 글씨체의 편지는 낭만이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집 우편함에 얌전히 꽂혀있는 친구의 답장은 마치 선물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은 재인폭포에서 전곡 방향으로 나오는 길에 있으며 포천시와 연천군에 함께 걸쳐 있다. 베개 모양처럼 누웠다고 해서 아우라지 베개용암이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데, 안내소에 주차를 한 후 약 10여분간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이 있는 한탄강의 건너편에 전망대가 있으며 망원경으로도 관찰이 가능하다. 전망대 인근에는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어민들이 조그마한 배와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보인다. 주변에 차량 이동이 거의 없어 너무나 조용하고 한적했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에서 시작되는 한탄강 주상절리길은 또 다른 묘미를 준다. 한탄강 주상절리길은 총 27.9㎞로 포천과의 경계인 영평천으로부터 한탄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도감포까지 4개의 구간으로 나누어진다.
영평천길(푸르내길)은 5.5㎞로 포천시와의 경계인 청산면 백의리 영평천에서 영평천이 한탄강을 만나는 아우라지까지이다. 아우라지에서 한탄강 하류 쪽으로 고탄교까지 ‘땅에 미소길’은 8.3㎞이며 다음 하류 쪽으로 고탄교에서 은대리성까지는 ‘선사 유적길’로 총 8.2㎞, 마지막으로 한탄강이 임진강을 만나는 도감포까지는 5.9㎞이다. 연천 쪽 한탄강을 둘러싼 총 길이 27.9㎞의 한탄강 주상절리길에서는 주상절리의 절경과 더불어 선사 유적부터 삼국시대 그리고 근현대 역사 유적과 현대를 살아가는 지역주민의 삶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한탄강지질공원).
○ 양원리 지석묘(고인돌)
양원리 지석묘는 파주에서 연천으로 들어오는 경계에 위치해 있다. 필자는 전곡읍을 갈 때 항상 의정부 – 동두천- 전곡을 지나는 자동차 전용 국도를 이용한다. 구리-포천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의정부의 민락IC로 빠져나오면 이 도로와 바로 연결된다. 국도 3호선 우회도로이다. 얼마 전까지 동두천까지만 도로가 이어졌는데 최근에는 전곡까지 개통되었다.
이 도로는 언제나 한적해서 좋다. 그리고 곡선 코스 없이 거의 일자로 달릴 수 있다.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동두천 인근에서 남면이라고 씌여진 표지판을 보고 빠져나오면 어릴 적 잠시 살았던 은현면 봉암리가 나온다. 필자는 봉암리에서 전곡으로 가는 외진 도로를 항상 이용한다. 길가의 편의점에서 커피도 마시고 잠시 쉬면서 살며시 상념에도 잠겨본다. 은현면에서 전곡읍으로 가는 길 의 도중, 한탄강 유원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양원리 지석묘의 표지가 우측으로 보인다. 도로에서 약 50M도 채 안 될 정도로 가깝다. 간판을 따라 우회전을 하면 조그만 마을 입구와 공장이 보이는데 그 앞 공터에 양원리 지석묘가 한가로이 자리하고 있다.
양원리 지석묘, 즉 고인돌은 나름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건물이나 인공 구조물도 거의 없고 야트막한 평지에 잔디밭, 주변에는 소나무로 보이는 큰 나무들이 적절한 배경을 이루면서 서 있다. 여러 그루의 큰 나무들 사이에 자리 잡아서인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 통현리 지석묘(고인돌)
현대인의 특성을 ‘건너뛰기’ 로 표현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유튜브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보지 않고 대부분이 요약본을 보거나 스킵, 즉 건너뛰기를 계속하면서 본다는 의미이다. 사실 필자도 어느새 건너뛰기가 습관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여행은 건너뛰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곱씹으며 그 지역을 눈과 귀에 담고 마음을 기록한다. 내면의 의식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기록이다.
전국의 자연인, 즉 인적이 없는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을 다룬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인기다. 메인 방송국의 프로그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높은 시청률을 보인다.
어쩌면 우리, 특히 중년의 남자들은 자연인을 꿈꾸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또는 내가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로망’을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잠시 대리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복잡한 일상의 도시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현대인은 삶과 생활에 지치고 피곤하다.
고인돌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이다. 통현리 일대는 연천 지역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고인돌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이 일대에는 8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제자리에 있는 것이 4기이고 나머지는 주변 지역으로 이동된 상태이다.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현재 고인돌이 위치한 주변으로 적어도 수십 기가 더 분포하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연천문화원).
통현리 지석묘(고인돌)는 3번 국도 전곡읍에서 연천읍 방향으로 약 10여분 가다 오른쪽으로 통현2리 고인돌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하면 된다. 이 마을 동쪽 끝자락의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다. 주변에는 민가와 비닐하우스 등이 있고 밭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통현리 지석묘는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비닐하우스와 공장 사이에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석묘를 지탱하기 위해 쇠기둥이 3개 박혀있다. 어울리지 않는 흉물스럽기까지한 모습이었으나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통현리 지석묘의 주변에는 야트막한 산과 경작지가 푸른색으로 펼쳐져 있다. 평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도 아니고 역사적 의미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원리 고인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보존이 안 되어 있다. 하긴 4만 여 기(基)나 되는 고인돌을 어찌 유적으로 잘 보존할 수 있을까?
연천 고인돌 공원은 통현리 고인돌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연천읍 통현리 199-2 외) 군 지정 문화재이다. 연천군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을 옮겨와 2003년 11월부터 2004년 6월에 걸쳐 복원하여 고인돌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연천 고인돌 공원은 총 16기의 고인돌을 모두 모아 둔 장소이다. 다양한 모양의 고인돌을 볼 수 있었다.
연천 고인돌 공원 바로 옆에는 아파트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다소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다. 그전에 보았던 고인돌은 모두 시골 조그만 마을의 한 구석에 있었다.
연천 고인돌 공원은 아파트 단지 바로 옆 근린공원의 느낌이다. 현대 문명의 상징인 아파트와 오래전 유적인 고인돌의 만남, 어쩌면 현재와 과거를 함께 묶어둔 아이러니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 학곡리 고인돌/적석총
임진강 가에 자리잡고 있는 학곡리는 예부터 학이 많이 날아들어 학곡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파주 적성면에서 임진강 비룡대교를 넘어 우회전하여 약 10분 자동차로 이동하면 우측에 학곡리 마을이 보인다. 임진강을 지척에 접하고 있으며 평탄한 지형의 자그마한 마을이다.
시골 마을의 정취가 아름다운 학곡리 마을은 이곳의 옛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유적을 품고 있는데, 하나는 고인돌이고, 다른 하나는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이다. 마을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학곡리 고인돌은 두 개의 고임돌 위에 넓은 덮개돌이 올려져 있는 탁자형인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 재질의 덮개돌 위에 차분하게 빗물이 적당히 고여 있어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학곡리 적석총은 마을을 조금 벗어나 임진강 가의 구릉지대에 만들어져 있는데, 강가에서 구하기 쉬운 둥글둥글한 강돌을 쌓아 올려 만들었기에 돌무지무덤이라고도 불린다.
학곡리 적석총은 학곡리 돌마돌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m정도 떨어진 임진강변의 자연제방 위에 위치하고 있다. 강 쪽의 구릉 말단부에 일정한 크기의 강돌을 보강하여 적석부의 붕괴와 유수로 인한 침식을 막고 자연구릉에 기대어 돌을 쌓았다.
○ 삼곶리 돌무지무덤/임진강 댑싸리 공원
삼곶리 돌무지무덤(적석총)은 다른 고인돌과는 조금 멀리 떨어진 연천군 중면에 위치해 있다. 1994년 유적건조물로 지정되었다. 삼곶리 돌무지무덤은 댑싸리 공원 내에 있다. 댑싸리 공원을 관람하면서 함께 보면 좋을 듯하다.
‘삼곶리 돌무지무덤’은 원삼국 시대 늦은 시기의 집단 무덤으로 임진강 유역에서 처음 발굴 조사된 돌무지무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무덤은 고구려 적석총과 다르게 분구 위의 돌층이 두텁지 않기 때문에 즙석묘, 즙석총, 즙석식적석묘 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적석분구묘’로 부르기도 한다.
연천 삼곶리 돌무지무덤은 중면 삼곶리, 충적지대에 있다. 1994년 경기도의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땅을 평평하게 정리한 다음 그 위에 한두 겹의 자갈돌을 깔아 무덤터를 마련하였다. 동, 서 2개의 무덤은 덧붙여 지어진 쌍분으로 평면형태가 표주박형에 가깝다. 무덤 북쪽에는 제단 시설로 생각되는 무덤지역이 있다. 덧널(곽) 안에서는 사람의 뼈조각, 쇠로 만든 화살촉, 구슬들이 나왔고 그 주변에서 토기조각과 숫돌들이 발견되었다. 전체적인 무덤의 양식이나 유물로 보면, 백제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
현재 안내판에는 연천 삼곶리 돌무지 무덤은 백제의 무덤이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임진강변에는 약 7km간격으로 백제의 돌무지 무덤이 분포하고 있으며, 주거 유적과 함께 이 일대에 대한 삼국시대 백제 초기의 지배 양상을 보여준다고 하여 돌무지 무덤이 백제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설명하고는 있다.
8월의 댑싸리 공원은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댑싸리는 쌍떡잎식물이며 명아주과의 한해살이풀이며 코키아라고도 일컫는다. 계절에 따라 그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임진강 댑싸리 공원은 연천 삼곶리 돌무지무덤 바로 앞 약 3만㎡ 규모로 댑싸리 2만여 그루를 심어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동글동글하고 자그마한 아이같은 모습의 댑싸리는 8월 말부터 불긋불긋해지고 9월 초 무렵이면 분홍색등 여러 가지 형형색색으로 가을의 들판을 물들인다.
댑싸리 공원 주변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주차장을 확장하는 듯하다. 주차장 규모를 보면 가을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것으로 보인다. 9~10월경이면 단풍이 절정에 이른 형형색색의 댑싸리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