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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추억 찾아 골목 여행: 서울 정릉동(貞陵洞)과 '건축학개론'

시간이 멈춰있는 곳! 서울 성북구 정릉동

다음은 1996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건축학개론」의 대사이다.

 

지금 자기가 사는 동네를 여행해 보는 거야. 평소에 그냥 무심코 지나치던 동네 골목들 길들, 건물들. 이런 걸 한번 자세히 관찰하면서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보세요. 자기가 살고 있는 것에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하는 것, 그것이 건축학개론의 시작입니다.

 

"'정릉'이 누구의 '릉'이냐"라는 교수의 질문에 여 주인공이 "정조? 정종? 정약용?"이라고 대답하자 다른 학생들은 웃는다. 하지만 정릉이 실제 누구의 릉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정릉(貞陵)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를 총애했던 이성계가 경복궁 인근인 정동(貞洞)에 두었으나 태종 이방원이 140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사적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를 꼬드겨 이복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한 계모 신덕왕후를 싫어하였으며, 신덕왕후 역시 방원을 경계하였다. 신덕왕후가 사망한 후, 결국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잡아두고 이복동생 이방번과 이방석을 붙잡아 죽였다. 이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를 비롯한 외척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지 못해 결국 정동에 있던 능을 지금의 정릉동으로 강제 이장시키고 능에서 묘로 격하하며 심지어 정릉에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다리 공사에 쓰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청계천 광통교 밑을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리고 이 돌들을 보면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힌 채 끼워진 돌들도 볼 수 있다. 조선이 사라진 후인 오늘날까지도 신덕왕후와 태종의 악연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축물이다(위키백과).

 

길음동에서 북악터널 방면으로 가다가 숭덕초등학교 앞쪽에서 좌회전, 아리랑시장을 지나면 정릉에 갈 수 있다. 정릉은 주택가 깊숙한 곳에 위치해있다. 승용차로 가기에는 매우 불편하다. 정릉 입구에 주차할 공간도 거의없다.

필자가 정릉동의 청덕초등학교를 다닐 때 거의 매년 정릉으로 소풍을 왔다. 지금은 현장체험학습을 대부분 전세버스로 이동하지만 당시에는 모두 걸어서 이동하거나 기껏해야 시내버스를 타야했다. 아무래도 초등학생들이라 학교에서는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곳에 소풍을 갔을 것이다. 그 많은 학생이 줄을 지어 이동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정릉은 이때 왔던 곳이다. 

 

이후 정릉에 대해서 들었던 기억은 없었다. 2012년 영화 '건축학개론'이 개봉되었다.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주제의 이 영화는 당시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에서 주 무대가 되었던 곳이 바로 정릉과 정릉동이다. 어릴적 추억을 소환하는 장면들이 가슴에 들어왔다. 영화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영화속에서 보았던 정릉동이 너무 반갑고 신기하기만 했었다.

 

영화 속 '정릉동(貞陵洞)' 천천히 톺아보기

영화 속 서연(배수지 扮)이 서울 지도에 빨간색으로 줄을 긋는다. 정릉에서 서쪽으로 북악터널을 넘으면 서대문으로 이어진다. 멀게만 느껴졌던 신촌이 바로 앞이다. 국민대학교를 지난다. 영화 속 정릉은 단순히 주인공 '승민'(이제훈 扮)이 사는 곳이 아니다. 여주인공 '서연'과 함께 사는 곳이자 첫사랑과의 소중한 인연이 시작된 동네이다.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승민은 서연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게 된다.

 

정릉동(貞陵洞)은 원래 사을한리(沙乙閑里)라 했는데 우리말 '살한이'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곳에 신덕왕후의 정릉으로 인해 '정릉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정릉 1~4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근에 국민대학교와 서경대학교가 있다. 경전철 우이신설선 정릉역, 북한산보국문역이 있다.  

 

특히, 정릉 4동 중에서도 북한산과 인접한 지역을 ‘청수동(淸水洞)’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정릉천 물이 맑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라 한다(위키백과). 이 청수동에는 1910년대에 ‘청수장(淸水莊)’이라는 일본인의 별장이 세워졌고, 그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동명의 요정으로 쓰이다가 2001년부터는 외형만 보존하여 북한산 국립공원 탐방 안내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유래로 이 지역은 지금도 ‘청수장’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 필자의 기억으로도 1980년대 정릉 4동의 버스 정류장 종점의 이름이 '청수장'이었다. 북한산 등반이 이루어지는 입구쪽이었다. 유명했던 '산장아파트'가 있던 곳이다.

 

정릉동은 서민의 마을이다. 1980년대, 필자를 포함한 정릉동의 주민은 그다지 여유로운 삶을 이루지는 못했다. 아직까지도 정릉동은 개발이 덜 되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많다. 유튜브에서 정릉을 검색하면 주로 오래된 집과 좁은 골목길들이 나온다. 정릉동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옛 마을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한다는 의미이고 필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한 복잡한 곳보다 이런 곳이 훨씬 그립고 또 계속 머물고 싶다.

 

1969년에 건축되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로 불린 정릉 스카이아파트가 정릉의 대표적인 오래된 건물이다. ‘배밭골(또는 배바윗골)’에 있었으며 2017년에 철거되었다. 필자가 졸업한 중학교의 맞은편 일명 ‘배밭골’이라 칭하던 마을에 있었다. 국민대학교 건너편의 인근에 있는 이 ‘배밭골’은 1990년대에도 시골 마을을 연상케 했다. 정릉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주 도로 건너편 북악산 기슭에 있는 지역이라 그런지 집들이 예전 시골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선술집이나 당구장, 음식점의 이용 가격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저렴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빈약했던 대학생들이 자주 놀던 곳이었다. 필자도 가끔 갔었는데 당시 서울 중심가의 물가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놀란 적이 있다. 단, 정릉동에서도 변두리에 있어 한참을 걸어야 했고 시설이 노후했기 때문에 자주 이용하지는 못했다.

 

다시 찾은 북한산 앞자락의 능마을 '정릉동', 그리고 '배밭골', '정릉시장'

2025년 1월에 다시 찾은 정릉시장과 ‘배밭골(배바윗골)’은 또 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겨울답지 않게 따듯한 날씨였다. 서울 시내 대부분이 마찬가지겠지만, 이 곳 정릉동도 주차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최대한 정릉시장쪽에 가깝게 주차하고자 몇 번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배밭골 인근의 좁고 경사진 공영주차장에 간신히 주차할 수 있었다. 급격하게 경사진 언덕에 차를 두는 일은 쉽지 않다. 몇 번이나 사이드브레이크를 확인했다. 

 

 

배밭골은 내 기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차도의 편의점과 식당의 간판이 새로 생긴 것을 제외하고는 주택가의 모습은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낡아버린 시멘트 구조물, 색이 바랜 간판들 등등, 새롭게 덧댄 구조물 뒤에 은근히 숨어있는 옛 간판과 건물의 모습들이 가려진 듯 숨어있었다.

 

 

촘촘히 하늘을 덮은 전깃줄 사이로 ‘배밭골’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자그만 주택들이 촘촘하게 자리잡고 도로는 넓지 않아서인지 전깃줄이 하늘을 가득 덮은 듯이 빼곡하다. 언덕 위편으로 오래된 주택들이 끝없이 보인다. 경사가 심해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뒤편에는 야트막한 북악산이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보도에 연탄재를 뿌린 모습이 보였다. 일단 연탄을 사용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고, 요즘 많이 쓰는 염화칼슘을 연탄재로 대신한 것도 추억의 한 모습이었다. 신기했다. 국민대학교 방면 배밭골의 끝자락에는 산을 등지고 절이나 사당이 많이 있었다. 신당(神堂)인 듯 하다. 이렇게 작은 지역에 10여 개 이상되는 신당이나 절의 간판이 보였다. 이곳이 사람의 왕래가 적고 조용한 곳이긴 하나보다.

 

 

 

그리운 모교(母校)와 옛 집을 찾아 추억 되살리기

배밭골에서 큰 도로를 건너면 바로 앞에 필자가 졸업했던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가 있다. 청덕초등학교는 중학교에서 언덕 위쪽으로 더 올라가야한다. 그래서 큰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에 이끌리다시피 정문을 통해 중학교로 들어가게 되었다.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예전(약 40년 전) 학생일때 등교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학교 운동장도, 교실이 있던 건물도 1980년의 모습으로 바뀌어 보였다. 어린 친구들이 저만치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그리고 빨간색 체육복을 입은 내가 커다란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바로 엊그제처럼 느껴진다. 필자가 다니던 때에는 '고려중학교'라는 이름이었으나 후에 지금의 이름으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예전 자신이 살았던 마을이나 졸업한 학교에 가면 마치 그때 함께 지내던 친구나 이웃주민을 만날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자연스레 모교의 건물로 발길이 닿았다. 아침이면 헐레벌떡 뛰다시피 등교하던 골목길과 학교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던 언덕길, 그리고 체육시간이면 공을 차고 노닐던 자그마한 운동장,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 정릉동에 오래전부터 살았느냐고 나도 모르게 물어볼 뻔했다.

 

 

 

 

정릉시장, 삶이 향기들이 흥건히 묻어나던 곳

정릉시장은 학창시절, 거의 매일 지나다녔던 곳이다. 빽빽한 골목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다. 집에서 10여 분은 걸어서 가야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먼 거리는 아니었다. 필자의 집은 고려중학교와 정릉시장의 사이에 있었다. 중학교 후문으로 나와 빼곡한 연립주택과 단독주택 사이사이로 미로를 찾듯 지난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정릉 4동 쪽에 사는 학생들도 많았는데, 우리집은 정릉 3동이라 비교적 학교와는 가까웠다. 친구들이 우리집 골목을 지나야 자신의 집쪽으로 갈 수 있었다. 덕분에 친한 친구들이 우리집에 자주와서 놀곤했었다.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서 가다 보면 '정릉슈퍼'가 보이고 복잡한 시장 골목을 쭉 따라가면 정릉시장이 나온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 버스정류장까지는 거의 20분 정도를 걸어야했다. 지금은 교통이 불편하다고 난리겠지만 그 당시는 그냥 걷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헌책방과 문구점, 레코드점, 전자오락실, 방앗간 등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현재는 간판이 그대로 걸려있는 상점도 있었다. 빛바랜 간판의 색깔과 지금은 쓰지 않는 글씨체로 써 있는 글자가 시간의 흐름을 증명이라도 하듯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 시내버스 1번, 2번, 5번, 8번 버스의 종점이 정릉이었다. 1번은 강남 방향, 5번은 종로, 8번은 신촌 쪽을 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위숫자 버스의 대부분이 정릉의 청수장(북한산 입구)에서 출발하거나 정릉을 지나다녔다. 이것마저 나름 우리들의 자랑거리였다.

 

'건축학개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릉 독서실, 남자 배우들이 소주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포장마차는 영락없는 정릉의 달동네 골목의 모습이다. 승민의 어머니가 순대국을 팔던 정릉시장. 내가 하교길 항상 지나다니던 길, 그들(승민과 서연)이 함께 꽃을 키우던 한옥은 모두가 정릉시장 부근에 있던 장소들이다. 특히 한옥은 친한 친구가 살고 있어 자주 놀러 갔었다.

 

봉국사 입구에서 건너 편 쪽에 있던 정릉천은 깨끗한 하천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난 여름, 유튜브를 통해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오리들이 노닐고,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지금은 잘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시커먼 하수가 흐르던 개천이었다. 여름철에는 냄새가 많이 났다. 

 

 

필자는 정릉동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졸업했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학창시절을 고스란히 이곳에서 보냈다. 고향이나 다름없다. 애정이 깊다. 건축학개론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정말 반가웠다. 한참 후에 알게 되었지만 영화 속 정릉동은 실제 정릉동이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는 실제 정릉에서 촬영했다고 착각한 채로 보았다.

 

정릉동은 길음동과 돈암동과 접해있다. 대학생 시절, 서초동에 있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 4호선 돈암(성신여대입구)까지 버스로 나와서 갈아타야했다. 길음역도 있었지만 정릉보다 북쪽에 있어 시내와 멀어지는 느낌이라 대부분 사람들이 돈암동 성신여대입구 지하철역으로 가서 환승했다. 사실 길음역에 가는 버스도 거의 없었다. 지금도 정릉동에서 지하철을 타려면 같은 방법을 써야 한다. 교통이 불편하다. 그래도 경전철이 있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한다.

 

길음동에서 바로 이어지는 곳이 정릉1동이며 지금의 서경대학교가 있는 높은 지역이 정릉4동이다. 필자는 국민대학교 쪽인 정릉 3동에 살았었다. 정릉 1, 2동은 길음동과 돈암동에 접해있고 북악스카이웨이와 아리랑고개가 있다.

 

건축학개론에는 정릉에서 사진을 찍다가 두 주인공이 만나는 모습이 나온다. 정릉은 돈암동과 이어지는 아리랑고개에 위치한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 가거나 사생(미술)대회를 했던 곳이다. 그런데 정릉에 오래 살았던 필자 조차 정릉이 누구의 능인지 영화를 볼때까지도 몰랐다. 하물며 정릉에 살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동방주택'은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인근에 있던 연립주택이었다. 앞쪽에 너른 터가 있어 마을버스 종점으로 이용되었다. 길음동 쪽에서 올라오는 마을버스는 동방주택 정류장까지 운행되었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이 버스로 학교 앞까지 이동했다. 고등학교는 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동방주택까지 와서도 다시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산꼭대기에 학교가 있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 지금의 서경대학교. 당시 국제대학교 야간대학이 우리 학교 건물을 함께 썼다. 야간대학이라 저녁 6시에 학생들이 등교했다. 우리와는 잘 만날 일은 없었다. 내가 졸업하고 이듬해 내 모교는 목동으로 이전했고 현재는 그 건물을 모두 서경대학교에서 사용한다. 정릉동에서 30년 이상을 거주하시다 최근에 작고하신 신경림(申庚林, 1936~2024) 시인은 정릉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 시장까지

 

                                           신경림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 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약방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떡집을 지나다가 잠깐 다리쉼을 하고

동향인 언덕바지 방앗간 주인과 고향 소식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엔 동태만을 파는 좌판 할머니한테 들른다. 

(중략)

 

나는 나 혼자만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을 죄스러워했다.

하지만 일흔이 훨씬 넘어

어머니가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약방도 떡집도 방앗간도 동태 좌판도 없어진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걸으면서,

마을길도 신작로도 개울도 없어진

고향집에서 언덕밭까지의 길을 내려다보면서,

(후략)

 

- 신경림 시집 『사진관집 이층』 2014

 

 

'건축학개론' 속의 정릉동, 추억 가득한 골목

앞서 말했지만, 정릉동은 나에겐 고향 같은 곳이다. 나의 유소년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리 가족이 서울로 들어오면서 처음 자리 잡았던 곳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우리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곳이다. 친한 친구가 최근까지도 정릉동에 살아서 가끔 그곳을 들르곤 했다. 서대문 쪽에 사는 친동생은 주말에 잠이 잘 오지 않을 때면 북악터널을 넘어 예전 살던 정릉동의 집 앞에 가본다고 했다. 비록 그때의 모습은 아니지만 이렇게 정릉동은 우리 가족의 소중한 추억의 장소이다. 현재 속의 과거, 세월이 비껴간 곳 정릉! 영화 「건축학개론」을 볼 때면 더욱 더 정릉동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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