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한 해가 어느새 절반이 지나가고 있다. 칠월 첫 아침에 해 본 혼잣말 속에 빠른 세월을 붙잡지는 못하는 안타까움이 인다. 여름의 언저리에서 하늘과 숲, 바람과 햇살이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아침, 눈 뜨면 푸르고 자고 일어나면 더욱 짙은 푸르름, 마음도 덩달아 넉넉한 푸른빛이 된다.
칠월은 초록빛 청포도가 알알이 영글어가는 계절이며 장마와 무더위가 함께 찾아오지만, 동시에 푸르름이 가장 생생한 달이다. 장마라 높은 습도로 끈적거리는 불쾌감이 있지만 시원한 바람이 스쳐 가는 포도밭과 투명한 청포도 한 송이를 떠올리면 참 싱그러운 계절이다.

계절의 변화는 참 신비롭다. 주변의 푸른 잎사귀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한결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푸르름이 짙어가는 계절이 오면, 유독 가슴 속을 잔잔하게 울리는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언제나 칠월이 오면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한 번쯤 마주치며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던, 우리가 참 사랑하는 이육사 시인의 대표작 청포도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이육사 청포도 전문)’
이 시는 일제 강점기에 이육사가 지금의 포항 비행장인 청포도밭에 숨어서 영일만의 푸른 파도를 보고 지은 시라는 말이 있다. 이 시는 17번이나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쓴 시로 수인번호 264번으로 불리며 고문과 절망을 견뎌낸 독립운동가 이원록의 시다.
이육사 하면 윤동주 시인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처절하게 역사의 현장 속에서 살아온 시인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40여 년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고 희생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시인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 구금되어 투옥 생활을 하고 끝내는 낯선 땅 중국 북경에서 그토록 원하던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그래서 청포도는 희망과 고향의 역사와 삶, 민족의 꿈을 상징하며 조국 해방을 맞이한,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
시의 전반적인 감각은 청포도의 색채 대비를 통해 의태법과 의인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싯구라는 것과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주는 시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 귀하고 애틋한 존재를 맞이하기 위해 식탁 위에 눈부신 은쟁반을 바치고, 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빤 하이얀 모시 수건을 정성스레 마련해 두라는 대목은 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하이라이트이다. 그리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정갈한 은쟁반 위에 하이얀 모시 수건과 푸른 포도를 올려두고 마중 나가는 그 지극한 정성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 어떤 화려한 보석보다도 빛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눈부신 기다림의 풍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자신을 돌아본다. 아직 눈앞에 손님이 당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올 것을 기정사실로 믿고 미리 식탁을 정갈하게 차려두는 이 태도에서 우리는 삶을 대하는 깊은 철학적 지혜를 배우게 된다. 확신이 있다면 기다림조차 절망이 아니라 설렘이 되는 법이다.
우리 이웃님들도 오늘 하루, 언젠가 내 삶에 찾아올 크고 작은 기쁨과 소중한 인연들을 위해 마음 한구석에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하고 정성 어린 은쟁반 하나 미리 마련해 두시는 건 어떨까? 달콤하게 익어가며 향기를 내어주는 칠월의 사랑도 일이 안 풀릴 때 엉킨 매듭은 더 단단해지고, 가슴에는 근심만 쌓여가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그래도 너무 조급해하지 않고 뜨거운 차 마시듯 한 걸음씩 풀어가며 길을 걸으면 먹구름 머물다 흩어지는 날에도 말없이 피는 꽃처럼 풀리게 마련이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 기다림은 희망의 시작이다.
칠월은 뜨겁게 타오르기 위해 오는 계절이 아니라 푸르게 견디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찾아온다. 청포도 한 알이 햇살과 비를 모두 품어야 달아지듯, 우리의 시간도 기쁨만으로는 가득할 수 없다는 것을 칠월은 조용히 일러 준다.
칠월의 산야는 진초록이다. 출렁이는 초록의 물결을 따라 불현듯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은 이어지는 일상이 갑갑해질 때면 바랑에 짐을 꾸려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생각의 풍요로움에 취하고 싶다. 칠월 어느 날, 높이 든 시야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 하나를 손에 쥐고 둘레길을 나선다. 망초꽃 흐드러진 들길을 따라 접시꽃 환한 돌담길에서 그만 발길을 멈추고, 포도 넝쿨 밑으로 알알이 박혀 있는 청포도,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이육사 시 청포도를 나도 모르게 읊조리고 만다.
장마가 지나간 하늘 끝에 무지개가 걸리듯, 눈물 끝에도 반드시 웃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 매미는 가장 뜨거운 날에야 비로소 노래를 시작하고, 나무는 한마디 불평 없이 짙은 그늘을 내준다. 그래서 칠월은 화려한 계절이 아니라 묵묵한 사랑의 계절이다. 태양도 지구도, 사람도 모두 마음이 흠씬 달궈진 정열의 계절이다.
이육사 시인은 칠월을 청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계절로 비유하여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담아냈다. 그래서 나는 칠월을, 사랑을 잉태하는 계절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름다운 사랑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비우고 자연에 순응할 줄 알아야 한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언제나 사랑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도록 서로 보듬고 이해하고 배려해 준다면 살아가는 동안에 참으로 후회 없는 삶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누군가는 말없이 가족을 위해 땀을 흘리고, 누군가는 작은 희망 하나를 붙잡고 내일을 향해 걸어간다. 부디 당신의 하루도 청포도처럼 맑게 익어가기를 그리고 비를 견딘 만큼 더 달아지고, 뜨거운 햇살을 품은 만큼 더 향기로워져, 계절이 끝날 무렵에는 참 잘 살아냈다 그 한마디를 스스로에게 웃으며 건넬 수 있기를 손 모아 본다.
설익은 청포알 하나를 툭, 깨물었다. 입안 가득 퍼져가는 설익은 과육이 스며드는 순간 비로소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뜨거운 뙤약볕과 아름다운 들꽃들, 그리고 짙푸른 신록의 우거짐이 내가 가져야 할 사물의 욕심이라는 것도 새롭게 깨닫는 길,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망초꽃 위에서 여름의 그물망을 엮고 있다.
칠월은 그렇게, 우리의 삶을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따뜻한 사람으로 익혀 가는 계절이다. 떠난다는 것은 나를 비우는 길이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는 욕망의 늪에서 저울질하며 달려왔던 길, 이젠 비워내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함이 소중한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