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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그날의 옥수수

위기 앞에서 이유보다 먼저 찾아야 할 것

강원도교육청에서 연락이 왔다. 오전에는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오후에는 교육청으로 이동해 관리자 연수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때 나는 40대였다. 에너지와 열정으로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교육계가 기억하는 나와 내가 기억하는 나는 아마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 열정 자체가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이제는 학교 현장 밖에서 그동안 쌓은 경험과 전문성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 시절 강원도로 가는 길은 지금처럼 편하지 않았다. 하루 전에 출발하거나 밤차를 타야 했다. 마침 밤 12시 반에 출발해 춘천에 새벽 5시쯤 도착하는 야간열차가 있었다.

 

학생들 눈높이에 맞춘 교육을 준비하려면 일주일 전부터 움직여야 했다. 특히 흡연예방교육을 위해 콩나물을 직접 키웠다. 생수병에 담배를 다섯 개비, 일곱 개비씩 풀어 넣고 조건을 달리해 콩나물을 키웠다. 담배에 노출된 정도에 따라 콩나물의 성장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담배가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기 위한 교육자료였다.

 

PPT만 들고 가는 강의가 아니었다. 담배, 모형담배, 살아 움직이는 금붕어, 타르실험용 빈생수병을 비롯해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교육자료만으로 큰 가방 하나가 가득 찼다.

 

“꼭 그렇게 먼 데까지 가야 해?”

 

가족들은 걱정하면서도 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가족이 몇 번이나 말했다.

 

“저 가방 잘 들고 타고, 내릴 때도 꼭 챙겨.”

 

강의에 얼마나 중요한 가방인지 알고 있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이 가방을 놓고 가면 큰일이었다. 밤기차를 탔다. 잠이 들었고, 새벽에 춘천역에 도착해 정신없이 내렸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가방이 없었다. 잠결에 내리면서 그토록 중요했던 교육자료 가방을 기차 안에 두고 내린 것이다.

 

단순히 아까워할 물건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몇 시간 뒤면 학교의 수많은 학생이 강당에 모일 것이고, 오후에는 강원도 각 지역에서 온 교육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또 한 차례 강의를 해야 했다. 위기였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지나간 이유를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다. ‘왜 가방을 두고 내렸을까’, ‘가족이 그렇게 당부했는데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봐야 눈앞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야 했다. 당시에는 찜질방이 비교적 안전하고 잘 갖추어져 있었다. 잠시 눈을 붙인 뒤 아침 10시 강의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담배를 샀다. 이른 아침부터 여성이 담배를 사는 모습을 곱지 않게 바라보던 당시의 사회적 시선도 느껴졌다. 그러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생수를 사고, 빈 병을 만들고, 담배를 꽂아 보여줄 지점토를 사기 위해 문방구를 찾아다녔다.

 

금붕어 실험에 사용할 금붕어까지는 구할 수 없었다. 콩나물 실험도 일주일 동안 키워야 하는 것이니 다시 만들 방법이 없었다. 대신 PPT에 들어 있는 사진과 영상으로 설명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빠르게 구분했다.

 

오전 10시, 강의가 예정된 학교에 도착했다. 담당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강당에서 자료를 점검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내가 가지고 간 USB가 학교 컴퓨터와 제대로 호환되지 않았다. 두 번째 위기였다.

 

그때도 ‘왜 안 열리지?’하고 원인을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학생들은 이미 담임선생님의 인솔을 받아 반별로 강당에 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5, 6학년 학생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술 지원을 해주시는 선생님이 컴퓨터를 점검하는 동안, 나는 강당으로 들어오면서 눈여겨보았던 벽면의 흡연예방교육 자료를 떠올렸다. 벽에 걸려 있던 교육용 이미지 몇 장을 떼어 와 손에 들었다.

 

그리고 강의를 시작했다. 그림을 보여주며 담배의 성분을 설명하고, 담배가 일으키는 질병을 이야기했다. 담배회사가 청소년에게 접근하기 위해 어떤 광고 전략을 사용하는지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PPT가 없어도 강의에는 공백이 없었다. 

 

오후에는 교육청으로 이동했다. 강원도 각 지역에서 모인 교사와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다시 강의를 했다. 다행히 그곳에서는 PPT가 정상적으로 열렸다. 오전보다 훨씬 풍성하게 자료를 보여줄 수 있었고, 인터넷에 공개된 나의사례 영상까지 활용하면서 강의를 무사히 마쳤다.

 

그날 이후 나는 중요한 교육자료를 USB에만 담아 다니지 않는다. 이메일에도 보내두는 습관이 생겼다. 위기는 때로 다음 실수를 막아주는 좋은 선생이 된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가을이었는데 길가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 하나를 사서 한입 베어 물었다. 쫄깃한 옥수수가 치아에 착 달라붙었다. 구수하고 달았다. 그날 그 옥수수는 유난히 맛있었다.

 

새벽 춘천역에서 가방을 두고 내린 것을 알았을 때의 아찔함, 문방구를 찾아다니며 급하게 교육자료를 다시 만들던 순간, USB가 열리지 않는데 학생들이 강당으로 들어오던 순간, 그리고 결국 두 번의 강의를 모두 끝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이 옥수수 한 알 한 알에 배어 있었던 것 같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날 먹었던 옥수수보다 맛있는 옥수수를 만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날 내가 배운 것은 흡연예방교육보다 더 오래 남아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는 이유를 찾는 것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먼저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따지는 것은 위기가 지나간 뒤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닥친 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나는 가끔 새벽의 춘천역과 그날의 옥수수를 떠올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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