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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1> "전쟁 도발 않는 한, 독도 영유 끄떡없다"

   해방 이후 독도의 한국 영토 귀속 사실 교과서 보완 필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등 보다 명확한 영토근거 제시해야
   
   독도 영유권 서술한 ‘후소샤’판보다 대부분 교과서 지도가
국경선 안쪽에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는 점이 더 심각

1952년 1월 한국정부가 ‘이승만라인’(‘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을 선포하자 일본정부가 항의각서를 전달하면서 시작된 독도 영유권 문제는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일본 관료의 ‘망언’처럼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어 왔다.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의 체결을 둘러싸고 독도 영유권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된 지 약 7년이 지난 오늘,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竹島: 독도의 일본식 지명)의 날’ 제정을 계기로 다시 독도 영유권 문제가 한·일 간의 현안으로 부상하였다. 여기에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가 후소샤판 공민교과서 검정신청본에 독도 전경사진과 함께 ‘한국과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다케시마’라는 설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자 독도 문제와 교과서 문제가 맞물리면서 일본의 역사 왜곡과 우경화를 성토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독도의용수비대 1953년 4월부터 약 3년 8개월 동안 일본의 도발에 맞서 독도를 지킨 것은 독도의용수비대 33명의 대원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정부 허가 없이 독도를 점령하고 정부에서는 독도의용수비대를 '해적'으로 부르는 등 공식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과서에는 실려 있지 않다.

지난 50여 년 동안 한국정부와 일본정부는 각각 독도를 자국의 고유한 영토라고 주장해 왔으며, 양국의 교과서 서술 역시 이러한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교과서에서는 삼국 시대 이래 독도가 고유한 영토라는 전제 아래 독도 영유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국정)에서는 독립협회, 대한제국, 의병전쟁, 애국계몽운동 등의 주권수호운동을 서술하는 가운데 ‘간도와 독도는 어떻게 되었나’라는 항목을 두어 조선 초기에서 일본의 불법적인 독도 편입에 이르는 독도 영유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국정)에서는 ‘통치구조와 정치활동’이라는 장에서 근대 대외관계의 변화를 서술하는 가운데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끝 부분에 숙종 때 안용복의 독도 영유권 확인과 19세기 말 울릉도 개척과 독도 관할을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2005년 들어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근·현대 부분이 검정으로 바뀌면서 독도에 관한 서술이 배치와 내용 면에서 상당히 개선되었다. ‘국사’ 교과서(국정)에서 대외관계의 일환으로 독도를 서술하였지만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검정 6종)에서는 ‘근대 사회의 전개’라는 장 속에서 동학농민운동, 대한제국, 독립협회, 항일의병전쟁, 애국계몽운동 같은 민족운동을 서술하는 가운데 간도와 독도를 함께 배치해 독자적인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시에 영유권 침탈의 맥락을 강조하였다.   내용은 출판사별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삼국시대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독도 영유의 역사-(1)독도는 6세기 초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이래로 명백한 우리의 영토 (2)17세기 말 일본과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자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 (3)1880년대 일본 어민의 울릉도 침입에 대항하여 쇄환정책을 중단하고 울릉도 개척을 실시 (4)1900년 정부는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키고 독도를 관할 (5)1905년 러일전쟁 중 일본은 불법적으로 독도를 편입-를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독도에 관한 서술이 개선되었지만 서술 시기가 1905년 일본의 불법적인 독도 편입까지로 한정되는 바람에 해방 이후 독도의 한국 영토 귀속과 관련된 사실이 빠져 있다.(중앙교육진흥연구소판 ‘한국 근·현대사’에만 독도 전경사진에 대한 설명으로 해방 이후 독도의 한국 영토 귀속에 관한 내용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독도 영유의 역사에서 삼국시대부?20세기 초에 이르는 역사적 근거만큼 해방 이후 독도의 한국 영토 귀속과 한국의 배타적 점유가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해방 이후 독도 영유의 역사가 보완되어야 한다. 그리고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경우에도 독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하고 있는 일본 지도를 제시하기 보다는(대한교과서판 ‘한국 근·현대사’ 75쪽, 법문사판 ‘한국 근·현대사’ 77쪽) 일본의 독도 편입에 앞서 대한제국의 독도 관할을 보여주는 1900년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나 1877년 메이지(明治)정부에서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 공문서 같이 보다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에서는 ‘북방영토’(러시아 명칭은 쿠릴열도) 영유의 역사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반면 독도에 대한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 후소샤판 중학교 공민교과서에서만 독도를 일본 영토로 서술하고 있다. ‘새로운 공민교과서’에서는 ‘현대정치의 제도와 목적’이라는 장 아래 ‘주권국가와 국제관계’라는 항목을 두고, 주권과 영역의 개념을 설명하고 난 후 “영역은 각 나라 역사의 산물이면서 영역의 획정은 국제분쟁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쿠나시리(國後), 에토로후(擇捉), 시코탄(色丹), 하보마이(齒舞)제도의 북방영토, 일본해 해상의 다케시마, 동지나해 해상의 센카쿠제도(尖閣諸島)에 대해서는 각각 러시아, 한국, 중국이 그 영유를 주장하고 일부를 지배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영토이다”(104-105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중·고교 지리 교과서와 사회과지도·고등지도에 나오는 지도를 보면 대부분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국경선이나 해상경계선을 그어 놓았다. 더욱이 도쿄서적 발행 중학교 사회과지도와 니큐(二宮)서점 발행 고등지도 같이 독도를 별도로 떼어 시마네현 소속 다케시마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 중학교 사회과지도 58쪽
독도가 다케시마로 표기되어 있고 해양경계선이
울릉도와 다케시마 사이를 지나고 있다.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독도에 대한 서술이 없는 것은 일본의 근대 국경 획정과 관련되어 있고 일본이 러시아에 영토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북방영토’에 비하여 독도의 비중이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청일전쟁 과정에서 획득한 ‘센카쿠열도’(중국 명칭은 댜오위타이(釣魚臺)군도)를 교과서에 넣지 않은 것으로 보아 침략전쟁의 와중에서 일어난 영토 침탈을 은폐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흔히 우경화 혐의가 농후한 후소샤판 공민교과서를 집중적으로 비판하지만 실제로 일본 대중의 독도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지도의 표기다. 설령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서술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지도에 독도가 다케시마로 표기되어 있고 국경선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면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인식이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각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서술은 양국의 역사인식 차이만큼 상이한 구성과 내용을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립되는 부분은 영토 문제에 대한 서술일 것이다. 과연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한 한·일 양국의 소통은 불가능할까? 누가 뭐래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배타적인 고정관념에 갇혀 있다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이 전쟁을 도발하지 않는 한 한국의 독도 영유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좀 더 느긋하게 일본의 행보를 지켜볼 수 있을 것이며, 고정관념에 갇힌 교과서 서술을 되돌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독도에 관한 사실도 아직 많은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우산국·우산도와 독도의 관련, 석도(石島)와 독도의 유래, 해방 이후 독도 처리와 한국 귀속 과정 등 굵직굵직한 문제들이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후소샤판 역사교과서의 검정 통과와 채택 여부를 둘러싸고 ‘교과서사건’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는 오늘, 1998년과 달리 독도 영유권 문제는 교과서 문제, 과거사 문제와 관련되어 제기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독도 영유권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독도 영유권 문제에 개입하는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이 그동안 20여 차례에 걸친 시네마현의 영유권 확립 촉구와 정부 차원의 담당기구 설치, 다케시마의 날 제정 요구를 중앙정부에서 외면해 오자 우파들이 중심이 되어 2002년 의원연맹을 결성하고 독자적 조례안을 내놓기에 이른 것이라는 정황 설명이나, “최근 일본 텔레비전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허수아비와 일장기를 태우는 모습이 여과 없이 장시간 방영되고 있다…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면 시마네현 몇몇 사람들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을, 일본 전 매스컴이 주목하고 일본의 모든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안이 되고 만 것이다”(신명직, ‘경북 앞바다에 놀러오게 하라’, 한겨레21, 2005.3.29.)라고 일본의 소수 전쟁주의자와 보통의 일본 사람을 구별할 것을 요구하는 한 재일한국인의 목소리는 독도 영유권 문제가 일본에서 벌어지는 ‘내전’(內戰)-냉전 해체 이후 일본 사회의 진로와 정체성 형성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사이의 싸움-과 연루되어 있으며,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한국의 반응이 일본의 내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 준다.
또한 한국에서도 과거사 문제, 국가보안법 문제 등을 둘러싼 내전이 벌어지고 있고 교과서 문제와 독도 영유권 문제가 여기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나아가 일본의 내전과 한국의 내전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근시안적인 것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연구재단 연구위원 배성준


[다음 회는 ‘만주를 둘러싼 중·러의 영토분쟁’(최덕규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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