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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3> “해양주도권, 석유자원 양보할 수 없다”


   조어도 지도에 표기, 국경으로 분명히 명기하지 않아
외교적 절충 통해 해결, 교과서에 직접적 언급 안 해
   
   다른 교과서엔 언급 없고, 후쇼사 공민교과서만 다뤄
2005 검정본 ‘역사·국제적으로 일본 고유영토’ 강조

동아시아의 역사분쟁은 과거사와 역사 교과서 문제에 이어 이제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분쟁에서 실제 충돌로 이어질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이 해양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이다. 해양 영유권 분쟁은 최근 해양자원 부존가능성과 해양의 경제적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더욱 가열되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의 영유권 분쟁에서 일본은 거의 모든 분쟁의 당사국이다. 일본은 한국과는 독도의 영유권 문제로, 러시아와는 북방의 4개 섬 문제로, 중국과는 조어도(센카쿠 열도) 문제로 마찰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어도의 위치
일본 오키나와와 대만 사이의 동중국해에 위치해 있는 7개의 조그만 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는 조어도는 중국대륙에서 330㎞, 대만에서 170㎞, 일본에서 410㎞가 떨어져 있다.

조어도(釣魚島)는 일본 오키나와와 대만 사이의 동중국해에 위치해 있는데 7개의 조그만 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일본이 점유하고 있으나 중국·대만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영유권을 주장하는 국가 마다 명칭도 각기다르다. 즉 일본은 센카쿠 열도(尖閣列島), 중국은 조어도(釣魚島), 대만은 조어대(釣魚臺)로 부르고 있다.  

조어도는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토로 귀속되었다가 1951년 9월 미-일 강화조약 체결 때 일본으로부터 미국으로 이양되었다. 1972년 5월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할 때 이 섬도 일 본령으로 편입되어 일본이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곳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일어나지 않았으나, 1969년 유엔이 조어도 부근 해저에 석유를 포함한 막대한 천연자원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특히 100억∼1000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면서 중국과 대만이 각기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조어도가 국제법적으로,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중국과 대만은 힘으로 영토를 약탈한 것은 국제법상 무효라고 반박하며 이곳을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어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먼저 일본 쪽에서는 1895년 1월 14일 일본정부 각의(閣議)에서 영토 편입과 경계표지 건설을 결정하고, 4월 1일 칙령 제13호로 국내법상 영토 편입조치를 시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1895년 5월에 청일전쟁의 승리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이 새롭게 청으로부터 취득한 영토는 대만과 팽호도(澎湖島)이고, 조어도는 시모노세키조약과는 관계없이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다고 일본은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 제2조에서 일본의 영토주권이 배제되어야할 범위에 조어도는 포함되지 않으며, 이 조약 제3조에 따라 조어도는 미국의 신탁통치에 들어갔다가 오키나와 반환협정에 의거 일본에게 반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과 대만 쪽에서는 첫째, 조어도는 대만의 대륙붕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지질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지리적 인접성을 주장하고 있다. 둘째, 이 섬에 대한 중국인들의 점유와 개발을 입증하는 각종 역사적 문헌이 존재하고, 16세기 중국 연안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중국의 연안 방위 구역을 설정했을 때 조어도는 푸젠 성의 5개 해상 방위구역 가운데 하나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1893년 서태후(西太后)가 셩쉬엔후이(盛宣懷)에게 하사하여 일본보다 먼저 영유권을 표시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셋째, 중국은 시모노세키조약 제2조에 규정하고 있는 ‘대만에 인접하거나 부속된 도서’로서 조어도가 일본에 강점되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이 카이로 및 포츠담선언에 의거, 중국에 반환, 복귀시켜야 할,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절취한 모든 영토’ 또는 ‘탐욕과 폭력의 수단으로 약탈한 모든 다른 지역’에 조어도가 당연히 포함된다는 것이다.

조어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아직까지 당사국간의 무력충돌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양국 사이 외교적 마찰 및 민간차원의 항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78년, 1988년, 1996년 3차에 걸쳐 일본의 우익단체인 ‘일본 청년사’가 이곳에 등대를 설치하여 일본의 영유권 및 점령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노력에 대해 중국, 대만 및 홍콩에서 대대적인 일본 규탄시위 및 항의가 발생했다. 중국은 1992년 2월 남사군도(南沙群島), 서사군도(西沙群島) 및 조어도를 포함하는 영해법을 발표하여, 일본 측의 거센 외교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2000년 4월에는 일본 청년사가 隔殆?신사(神社)로 보이는 조형물을 세움으로써 중·일간 외교마찰이 심해지기도 했다. 반대로 2004년 3월에는 중국인 7명이 조어도에 상륙을 시도했다가 일본 오키나와 경찰에 체포되어 추방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조어도 문제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현재 실질적 지배를 행사하고 있는 일본에서 활발하고 중국에서는 주로 신문 잡지를 통한 여론의 환기 정도에 머물고 있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부터 조어도의 역사적 연원에서부터 영유권 문제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71년 교토대학 교수였던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淸)가 조어도의 일본 영유권 주장은 일본 군국주의의 소산이라고 비판하고 조어도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이 섬들이 중국 영토라는 것을 실증하면서 조어도 영유권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다. 이에 일본정부뿐만 아니라 공산당, 사회당, 우익단체에서 조어도가 일본 영토이고 실질적 지배를 하고 있음을 천명했고, 국사관대학(國士館大學) 법학부 교수 오쿠하라 토시노(奥原敏雄)가 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오쿠하라는 메이지유신 이전 조어도는 주인 없는 땅이었고,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주인 없는 땅을 선점했기 때문에 ‘주인 없는 땅은 선점한 국가의 땅’이라는 국제법상의 해석에 근거하여 조어도가 일본 영토임을 주장했다.

두 사람은 똑같은 사료에 대해 서로 달리 해석하고, 근대 전후 상황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평행선을 달리면서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다. 이노우에는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어도가 중국 영토이고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본인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계기로 조어도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조어도 영유권에 대한 상당한 자료를 축적해놓고 있다. 반면 중국의 경우 조어도 문제에 대해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학술적 대응이나 논리적 대응은 부족한 편이다.  

"조어도를 반환하라"
2004년 6월 22일 일본의 조어도 점유를 항의하는 중국 홍콩의 청년들이 조어도에 상륙하려다 일본 해상순시선의 저지를 받고 물러났다.


조어도 문제에 대해 중국과 일본의 교과서 서술을 살펴보면, 먼저 중국의 사회 지리 교과서에는 조어도를 지도상에 표기하고는 있지만 중국 국경으로 분명하게 명기하지는 않았다. 중학 교과서 ‘중국근대현대사지도책’과 ‘역사와 사회’(7학년) 교사용 지침서에 있는 지도에는 조어도를 표기하고 국경선을 긋지 않아 모호하게 남겨놓고 있다. 이것은 남사군도를 중국의 영토로 분명하게 포함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국은 조어도 문제에 대해 사실상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조어도에 대한 정책은 외교적인 절충을 통해 해결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교과서의 서술에서도 조어도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입장과는 달리 일본은 조어도 문제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본의 다른 교과서에는 조어도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후쇼사 공민교과서에는 이를 다루고 있다. 2001년에는 센카쿠제도에 대해 ‘중국이 영유를 주장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것을 기술했던 것에서 2005년 검정 본에서는 ‘역사적으로 국제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일본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강화하고 정치 군사적으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잠재적인 적으로 상정하여 공동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일본이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공세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조어도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하고 국제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지역은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생명선과 같은 지역이다. 대부분의 수출 상품이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으며, 90% 이상의 석유가 수송되는 길목이다. 그리고 일본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도 이 지역의 지배권은 중요하다.

중국도 앞으로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 영향을 행사하는 데 이 지역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중국의 동중국해 해양 전략은 먼저 외국 석유회사와 합작으로 대륙붕의 석유자원을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조어도는 중국의 해양 전략에서도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현재 조어도 영유권 분쟁은 막대한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중·일 간의 자원 쟁탈전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향후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해상 주도권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전초전 성격도 짙다. 여기에 최근 증가하고 있는 중국의 패권주의 경향을 중심으로 나타난 동아시아 영토 분쟁과 일본의 우익화 경향이 맞물리면서 민족문제, 국가 이익문제, 국제법적인 지위 등 복잡한 양상으로 점점 첨예화 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계속된 독도 영유권 주장과 일본인의 독도 상륙 시도, 중국의 조어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조어도 상륙 시도는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양 영유권을 둘러싼 3국의 치열한 논쟁의 일단으로 나타난 것이다. 조어도는 중국과 일본에 관련된 분쟁이고 독도는 한국과 일본에 관련된 분쟁이지만 조어도와 독도를 둘러싸고 일본은 상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조어도에 관해서 일본은 역사적 당위성보다는 선점에 의한 실효적 지배를 강조하고 있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적, 국제법적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조어도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남사군도 문제에 대해서는 선점에 의한 실효적 지배를 강조하고 있다. 해양 영유권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국제법적·실질적 지배를 둘러싸고 복잡한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따라서 해양 영유권에 대한 일본과 중국의 주장의 모순을 파악함으로써 한국도 해양 영유권 주장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박정현


[다음 회는 박장배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의 ‘티베트의 영토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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