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
국·검정 모두 ‘독도와 동일한 비중’ 으로 서술 ‘고토회복’ 환상보다 ‘조선족’등 현실 대처 필요 |
|
|
中 |
‘간도(문제)는 없다’고 생각, 교과서 서술 안 해 ‘연길지역 침탈위해 간도문제 날조’시각 지배적 |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작년 7월,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한 카드로 간도 되찾기를 내세운 ‘간도되찾기운동본부’가 발족했다. 9월에는 여야 의원 59명이 ‘간도협약 무효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온라인 공간에서도 간도 되찾기를 외치는 목소리가 전폭적 지지를 받으면서 해방 이후 최초로 간도문제가 국민적 이슈로 떠올랐다. ‘고구려는 중국 지방정권’이라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 분노한 국민들에게 만주와 연해주를 포괄하는 저 넓은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은 중국의 역사 왜곡을 일거에 뒤집는 후련한 소식이었다.
그러나 작년 8월 한·중 양국이 ‘역사문제로 인하여 한중간의 우호협력관계를 손상시키는 것을 방지하기로 노력한다’고 합의, 문제가 된 고구려사 부분을 삭제하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분노는 점차 수그러들면서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럼에도 일부 언론에서는 꾸준히 간도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서는 9월 4일, 간도협약이 체결된 1909년 9월 4일을 기억하자는 뜻에서 ‘간도의 날’을 선포했다.
‘간도협약 무효’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즉 ‘(1)간도는 단군조선 이래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지배한 땅이고, 17세기부터 무주지(無主地)로 남아 있던 땅을 19세기 후반 우리 민족이 개간하고 거주해 왔다. (2)백두산정계비의 ‘토문(土門)’이 쑹화 강이라는 사실은 이를 입증하고, 나아가 무주지로 남아 있던 땅 전체가 우리 영토다. (3)아무런 권한도 없는 일본이 강제로 강탈한 외교권을 빌미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은 무효다. 동북공정에 대한 정부의 대처는 “사대주의적이고 미온적”이며 “불법적인 간도협약의 원천적 무효를 지나(支那:중국)에 정식 통보하고, 동북공정의 즉각 중단을 요구해야 한다”(간도의 날 선언문)고 주장한다.
‘간도협약 무효’를 주장하는 이들은 중국에 정식으로 간도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정부를 강력 비난하지만, 실은 정부도 역사교과서를 통해 ‘간도협약 무효’를 주장해 왔다.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는 간도를 독도와 나란히 배치하고 독도와 동일한 비중으로 간도를 서술하고 있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독립협회, 대한제국, 의병전쟁, 애국계몽운동 등의 주권수호운동을 나열하는 가운데 ‘간도와 독도는 어떻게 되었나?’라는 항목을 두어 간도 영유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의하면 조선 숙종 이후 간도는 우리의 영토였으며, 간도협약으로 청에 넘어 갔다. 즉 고구려, 발해의 땅으로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간도는 “조선 숙종 때 조선과 청은 국경선을 정하면서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였”(239쪽)으며, 19세기 말 이래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던 간도를 일본은 안동과 봉천 간의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청에게 넘겨주었다.
|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서 제시하는 간도의 범위 |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명시적으로 간도가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병자호란 이후 청과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간도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다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편 2005년부터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근·현대 부분이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뀌면서 간도에 관한 서술은 배치와 내용 면에서 강화됐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검정 6종)에서는 ‘근대 사회의 전개’라는 장 속에서 동학농민운동, 대한제국, 독립협회, 항일의병전쟁, 애국계몽운동 같은 민족운동을 서술하는 가운데 ‘간도와 독도’를 별도의 항목으로 두어 간도 영유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내용은 출판사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간도는 발해와 고구려의 옛 땅으로 조선 후기 이래 우리 민족의 새로운 생활 무대로 개척되었으며 (2)19세기 후반 간도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늘어나면서 청국과 영토분쟁이 일어났으나 백두산정계비의 ‘토문’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으며 (3)대한제국 수립 이후 간도에 관리를 파견하고 함경도 행정구역에 포함시켰으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에게 넘겨주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처럼 명시적으로 간도가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간도와 독도를 나란히 배치하고 간도를 독도 이상의 비중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은 독도와 마찬가지로 간도의 영유권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종의 교과서에서 간도(의 일부)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는 대한제국 시기의 지도를 싣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법문사판처럼 “을사조약은 일본이 일방적으로 공포한 것이기 때문에 을사조약을 근거로 성립된 간도협약도 무효이다”(77쪽)라고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더라도 간도를 청에게 넘겨주었다는 맥락이나 간도협약 관련 자료와 과제 등을 통하여 ‘간도협약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교과서가 간도의 영유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반면 중국 역사교과서에서는 간도에 대한 서술을 찾아볼 수 없다. 중국 북경의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중국근대현대사’(상)(人民敎育出版社, 2002)에서는 아편전쟁에서 중화민국의 수립에 이르는 역사를 설명하면서 ‘중국자본주의의 발생, 발전 및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의 형성’이라는 장 아래 ‘중국변강지구의 새로운 위기와 중국·프랑스 전쟁’, ‘갑오중일전쟁’, ‘중국을 분할하는 광란’, ‘의화단운동과 8개국 연합군의 대중국침략전쟁’이라는 항목을 두어 19세기 후반 중국의 영토 위기를 서술하고 있다. ‘중국근대현대사’(상)에서는 1870년대 이후 서북·서남·동남 국경의 위기, 중프·중일전쟁 및 의화단운동 진압으로 인한 중국 분할 등의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룰 뿐 간도문제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중국 역사교과서에 간도에 대한 서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중국이 ‘간도(문제)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간도문제가 러시아와의 국경문제나 열강의 중국 분할 같이 중국의 영역을 위협할 만한 사건도 아니었고 또 간도협약으로 간도가 중국의 영토로 승인되어 국경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굳이 교과서에 수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이유는 조선과 일본이 중국의 연길지역을 침탈하기 위해 간도문제를 날조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에 의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은 명대(明代) 이후 중국의 고유 영토였으며, 백두산정계비의 ‘토문’은 두만강을 가리킨다. 19세기 말 간도 개척민의 송환을 피하기 위해 조선에서 ‘토문·두만 양강설(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 강이라는 설)’을 조작한 데서 국경분쟁이 시작됐으며,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다시 간도문제를 날조, 연길지역을 침탈하려고 시도했다.
|
19세기말 중국을 분할한 열강들의 세력범위를 나타낸 지도(중국역사지도책(팔년급), 중국지도출판사 2003 10쪽) |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역사교과서의 인식과 ‘간도는 없다’라는 생각에서 간도를 고려하지 않는 중국 역사교과서의 인식은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 모든 영토문제가 그러하듯 간도문제 역시 양 당사국의 상반된 인식과 이해관계 위에 서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탄탄한 논리와 사료적 근거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활동해 온 장소라고 주장하거나 백두산정계비의 ‘토문’이 쑹화 강이라는 주장에만 의존하고 있는 간도 영유권 주장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간도의 범위가 분명하지 않다.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 간도라는 것인지, 백두산정계비의 토문을 근거로 쑹화 강 이동 및 헤이룽 강 이남의 지역이 간도라는 것인지 아니면 대한제국 시기 간도관리사가 통치하였던 지역이 간도라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도 합의된 바도 없다. 간도를 되찾자고 외치면서도 되찾아야 할 땅이 어디인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사실은 간도 영유권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둘째, ‘토문’이 쑹화 강의 지류라는 사실은 19세기 후반에 이미 알고 있었다. ‘간도협약 무효’를 주장하는 이들은 불법적인 간도협약을 무효로 하고 백두산정계비에서 발원하는 토문강이 쑹화 강이라는 사실을 중국 측에 내놓기만 하면 간도를 넘겨줄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양측의 백두산정계비 공동조사를 기초로 토문강이 쑹화 강이라는 사실을 2번이나 제시하였으나 중국 측에 의해 반박됐다. 1880년대 조·청 국경회담에서 이중하가 강력하게 제기했으나 결국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으며, 간도협약 직전 만주 침략을 노리던 일본이 강력하게 제기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물러서야 했다. 이러한 사실은 토문강이 쑹화 강이라는 일방적 주장만 가지고는 영유권 주장이 곤란함을 보여준다.
셋째, 간도 영유권 주장은 북한과 중국 간에 체결된 ‘조·중 국경조약’을 무시하고 있다. 일본의 패전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으로 간도협약은 사실상 무효가 되고 새로운 국경선을 긋기 위한 국경회담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북한과 중국은 1962년 ‘조·중 국경조약’을 체결, 백두산 천지의 중앙과 홍토우(紅土水: 두만강의 최상류)를 잇는 선을 국경선으로 확정했다. 당시 어떠한 논의가 오갔는지 알 수 없지만 다시 국경선이 획정되고 지금까지 40여 년이 흘렀다. 설령 흡수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조·중 국경조약’을 무효로 할 수 있는가는 국제법상 복잡한 문제이겠지만, ‘간도협약
무효’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북한의 존재나 이러한 문제는 간단히 무시된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간도협약이 무효가 되면 자동적으로 간도는 우리 땅이 될 것이라는 일부의 ‘환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간도협약 무효’를 제기하는 것은 북방 고토 회복이라는 환상에 갇혀 현실적인 곤란과 위험에 맹목적이게 만들 뿐 아니라 영토문제에 민감한 중국을 자극함으로써 운신의 폭을 더욱 좁힐 뿐이다. 지금 시급한 문제는 간도문제를 공식화하고 중국과 영토분쟁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들어 갈등의 파고가 높아가고 있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평화와 연대의 장소로서 간도(만주)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 ‘중국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인 조선족의 정체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들의 처지에서서 전망을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
|
필자소개 |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배성준 연구위원 | | |
|
다음 회는 마무리 좌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