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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4> 한족에 동화 않고 이원 체제로 제국 통치

중국 통치한 만주 정복왕조 요·금·청

몽골 元 제외한 정복왕조는 모두 ‘만주’에서 흥기
고유 풍습 유지, 한족에 변발 등 ‘만주화' 강요도
한족중심 역사기록, 만주를 ‘변경’으로 인식케 해
한족의 ‘북방 정복왕조 편입’이 실체에 더 가까워

중국의 한족왕조는 한 번도 남쪽으로부터 정복된 적이 없다. 당나라 이후 천여 년 간 중국의 일부 혹은 전부를 지배한 왕조 중 한족왕조 송(宋)(960-1279)과 명(明)(1368-1644)을 제외한 거란(契丹) 요(遼)(916-1125), 여진(女眞) 금(金)(1115-1234), 몽골(蒙古) 원(元)(1206-1368), 그리고 만주(滿洲) 청(淸)(1644-1910)은 모두 북방민족이 세운 정복국가였다. 북방민족 기마병의 뛰어난 기동성과 궁술에 의거한 강력한 군사력은 중원 한족왕조에게 끊임없는 위협의 존재였다. 이러한 군사·정치적인 열세에 처해 있던 한족왕조들은 문화적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우월감’으로 만회하려 했는데 그 중화주의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역사서술이었다. 한족 중심적 역사기록의 편견과 왜곡은 만주지역을 한국과 중국의 변경지역이며 주변의 ‘선진’ 문화 영향을 받은 오지로만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동아시아 역사에서의 만주지역은 고유의 문명을 가진 거대한 대제국의 원천지였다.
거란족의 요는 10세기 초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916∼926)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발해(渤海)를 정복하면서 만주지역을 장악했고 중국 오대(五代)의 하나인 후진(後晉)에 군사적 원조를 제공, 그 보상으로 지금의 하북·북경지역인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할양받았다. 이어서 송과 남북으로 대치하다가 1004년 '전연의 맹약'을 맺어 매년 한족왕조로부터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의 세폐(歲幣)를 받으면서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했다.

여진은 원래 거란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으나 12세기 초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阿骨打)가 여러 부족을 제압하며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다. 송과 요를 협공해 멸망시키고 북중국과 만주를 장악했고 이어서 1127년에는 송의 수도 변량(卞梁)마저도 함락, 송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를 사로잡았다. 이에 송은 망하고 다만 송 황실의 일원이 강남지역으로 도망하며 남송을 세워 다시 명맥을 잇게 된다. 남송의 첫째 황제 고종(高宗)은 금에게 신하의 예로 대하며, 매년 은(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세폐로 바친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체결했다. 그러나 금은 13세기 초 칭기즈 칸 몽골제국의 공격을 받고 도성을 중도(中都)에서 남쪽 개봉(開封)으로 옮기면서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1134년 건국 120년 만에 멸망했다.
벽화에 보이는 거란인의 모습. 머리 모양과 의복에서 한족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河北省文物硏究所, 宣化遼墓 - 1974~1993年考古發掘報告(下冊), 文物出版社 2001, pl. 10)

이후 여진족은 몽골 원과 한족 명나라시대에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면서 다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누르하치의 후계자 홍타이지는 다시 국호를 다이칭구룬(청나라)으로 고치고 주변 각국을 공략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여진 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신 만주라는 명칭을 채택하였고 청제국 건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만주족의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체제를 확립했다. 1644년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에 무너지자 명의 장군 오삼계(吳三桂)의 요청으로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여 청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 17~18세기에 강희제(康熙帝)·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의 3대에 걸쳐 동아시아 역사상 보기 드문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 열강의 침략과 태평천국의 난 등 외우내환의 겹쳐 급속히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서양문물의 도입하고 개혁을 시도했으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그 다음해 중국의 마지막 왕조는 멸망했다.

그런데 위의 정복왕조들은 몽골 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만주지역에서 흥기했다. 이 현상을 토마스 바필드(Thomas Barfield)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의 초원-만주-중원의 문명적 차이와 지정학적 관계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정착문명의 한족거주지 중원, 유목문명의 몽골 초원지역, 그리고 삼림과 스텝문명 만주의 상관관계는 중원-초원제국의 이원적 체제의 성립과 붕괴, 북중국과 만주를 다스리는 만주 정복왕조의 성립과 멸망, 그리고 다시 중원-초원제국의 이원적 국제관계체제로 가는 순환과정으로 보았다. 초원과 중원은 자연적·문화적 환경이 극단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유목제국과 한족왕조의 공존이 가능했다. 중원의 한족왕조가 유목민족에게 보낸 물자가 초원에서 재분배되면서 유목제국의 정치망떳?지탱했고 그 물자를 제공하는 한족왕조를 구조적으로 필요로 했기에 유목민족들은 중국을 직접 통치하려 하지 않고 다만 세폐와 무역을 강요하는 동반의 관계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즉 유목제국의 발전된 정치구조는 단순한 경제구조를 가진 초원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도로 조직화된 중원의 한족왕조에 대응하면서 필요한 물자를 제공받기 위한 것이었다. 유목민족에게 한족왕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같은 존재였고 한족왕조가 내란에 처해 위태로울 때는 여러 차례 군사를 동원해서 직접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족왕조가 멸망하면 물자의 제공원이 없어지고 몽골 초원지역은 다시 정치적으로 분산되었는데 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만주의 북방민족들이 흥기, 북중국지역을 직접 정복·지배했다고 보았다.

바필드는 만주에서 흥기한 정복왕조를 월경국가越境國家(Transborder States)로 불렀다. 이는 만주의 정복왕조들이 만주는 물론 중원과 초원의 ‘자연’적 경계를 초월, 여러 변경지역을 모두 통치하였기 때문이다. 바필드의 이론은 유목-정착 문명의 만남을 단지 ‘무역 혹은 약탈’로 보는 단순한 논리를 넘어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군사·정치·경제적 교류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만주의 북방민족을 단순히 초원과 중원 제국의 몰락만을 기다리는 기회자로 묘사하고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바필드의 주장과는 달리 초원의 유목민족과 만주의 소위 ‘半유목’민족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크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형성 과정, 제국 이데올로기, 국가의례, 그리고 한족통치의 구조와 패턴에서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초원과 중원의 제국들이 동반해 흥기하고 멸망했다는 주장도 실제 상황과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거란의 요나라는 송의 건국 이전에 이미 세워졌으며 몽골제국의 형성을 중원의 금과 남송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도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또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중원-만주-한국의 삼각 구도로 보는 연구에 비추어 볼 때, 바필드의 중원-초원-만주의 역사 순환이론은 당시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던 고려와 탕구트족 하국(夏國)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역할을 무시하고 있다. 동아시아를 하나의 통합된 단위로 해 당시의 복잡한 국제관계와 제국의 흥망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만주의 정복왕조와 중원 한족왕조의 남북대치는 물론 그 동서에서 견제세력으로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고려와 하 등의 역할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이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면 중원을 정복한 만주 정복왕조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만주 북방민족의 내륙아시아 문화와의 연결성, 제국 내의 한족과의 차별성, 이원적 통치체제의 특수성 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정복왕조를 세운 거란·여진·몽골·만주족들의 풍습과 언어는 중앙 유라시아 문명과 우랄알타이어계통에 속하며 한족과는 전혀 달랐고 북방민족은 한족에게 정복자로서의 강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정도의 한화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유목민족 전통을 상실하면 다른 유목민족의 침공 대상이 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들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정복왕조들은 각각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여기서 그들의 민족·문화적 자부심과 한화를 경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복왕조의 구조적 특징은 이원적 통치 체제인데 거란족의 요나라는 최초의 정복왕조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거란은 문화와 ‘민족’의 기준으로 통치지역과 피통치민을 구분했고 관직체계를 남북으로 나눠 한족과 발해민 등의 농경민은 남추밀원(南樞密院)에서, 거란족을 위시한 유목민은 북추밀원(北樞密院)에서 관할했다. 남북면의 관료들은 모두 황제에 직속되어 있었지만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고 국가의 중대사는 북부에서 장악했다.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남면의 군정(軍政)도 남추밀원이 아닌 북추밀원이 관장했고, 그 장관에는 원칙적으로 거란인만이 임명됐다. 이원적 통치체계는 일상생활의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는데 북부에서는 거란의 전통 의상을 그리고 남부에서는 한족 복식을 입도록 조치한 것이 그 한 사례다. 요의 중심은 명백히 장성 이북의 유목지대였고, 그곳에서 구축된 독자적인 체제를 기반으로 남쪽 농경지대를 지배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원적 통치체계는 그 제도적 장치와 시행에는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금과 원, 그리고 청대까지 계속되었다. 금나라 시기의 화북지역 인구는 약 4800만으로 추정한다. 그 중 한족이 약 2/3를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여진족은 그들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만주지역 거의 모든 여진족을 남으로 이주시켰다. 그들은 요나라의 이원적 체제를 이어받아 여진족에 대해서는 고유의 부락체제인 동시에 정치·행정·군사조직인 맹안모극(猛安謀克) 제도로 통치했지만 한족에게는 주현(州縣)제를 적용했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의 후예 만주족들은 입관 후 고유의 제도와 풍습을 유지했고 오히려 한족들에게 ‘만주화’를 강요하기도 했다. 청대 한족의 ‘만주화’는 변발과 관복, 그리고 청제국의 공식 언어인 만주어의 위상 등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결국 만주에서 흥기한 북방민족 제국은 정복 민족 집단이 대다수 피정복자 한족을 지배하는 이분화된 정치체제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조선은 명나라의 관복(왼쪽)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관복은 명대와는 현저하게 다른 만주 식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한족 ‘만주화’의 대표적 사례이다. (徐海榮 主編, 中國服飾大典, 華夏出版社, 2000; 古宮博物院 編, 淸史圖典 第6冊 上, 卷紫禁城出版社 2000, 58쪽)

만주에서 흥기한 요·금·청은 정복왕조로서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문화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이원적 국가체제로 제국을 통치하였다. 하지만 현대 중국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면서 독자적 문화와 역사를 가진 전근대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과 ‘국가’를 ‘중국적 세계질서’ 혹은 ‘중국국가’의 범주에 넣으려고 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비논리적 역사관이 중국 내부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개념이 고정된 민족, 문화, 혹은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과 비슷한 성격의 지정학적 용어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금·청나라를 중국사의 일부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 한족의 일부 혹은 전부가 다민족제국인 북방 정복왕조의 일부로 편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역사의 실체에 더 가깝지 않을까? 오늘날 만주 고유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독자적인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만주사’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주에 존재하였던 遼·金·淸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중국’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한족과 한족의 역사기록의 관점에서만 보려는 연구 자세를 버려야 할 것이다.
윤영인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 다음 회는 노기식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의 ‘만주, 만주족, 청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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