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운동권 출신으로 대표적인 당내 소장파 3선 의원. 특유의 친화력이 강점으로 꼽힌다. 16대 총선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군포에서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지만 2003년 7월 탈당한 후 새천년민주당의 친노 세력들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창당, 같은 지역서 17대에 이어 18대서도 내리 당선됐다. 한나라당 시절 국가보안법 폐지와 한총련 학생 석방을 주장해 보수 세력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대학 재학 중 77년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됐고 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또 다시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2번이나 제적됐다가 1987년 졸업장을 받았다. 1992년 이선실 간첩사건 연루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6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한나라당에 몸 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다’며 원내대표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가 원혜영 후보를 지지하며 중도 하차했다.
이념 지향적으로 보이는 과거경력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실용노선으로 나오니까 민주당이 이념으로 가면 망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실용은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누구를 위한 실용인가가 중요하며, 중산층과 그 이하를 위한 실용 정책으로 한나라당과 경쟁해야 한다고 밝힌바 있다.
교과위원장으로 선출된 직후 김 위원장은 “학생 중심의 교육, 과학 분야에서는 연구원 중심의 개발 및 대학과 연구 기관의 경쟁력 강화를 강조하겠다”고 밝혔다.
또 “영어몰입 교육 및 수월성 우선 교육정책에 대해서는 여야 의원들간의 합리적인 토론과 심의를 통해 원만히 처리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부인 이유미(51)씨와 3녀. ▲58년 생, 경북 상주 ▲경북고, 서울대 정치학과 ▲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원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 ▲16, 17,18대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