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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6.25 직전에도 뜨거운 '교육열'

1만8천개 교실이 지붕없는 노천교실
美정부 기록문서, 50년 당시 남한 교육현실 묘사

"전국 초등학교의 1만7천561개 교실이 지붕이 없는 노천 교실, 학생 1명의 한달 수업료는 351원, 서울의 초등학교에 여성 교장선생님은 단 1명, 부유한 학부모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학부형회의 치맛바람이 문제..."
1950년 6.25전쟁 발발을 앞둔 한국 교육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내용의 일부분이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1950년 1월11일부터 14일까지 한국을 방문한 필립 C. 제섭(Philip C. Jessup) 무임소대사가 한국의 교육계 주요인사들과 만난 후 '제섭 파일'을 작성, 기록으로 남겼다.

24일 연합뉴스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메릴랜드 소재)에서 찾아낸 '제섭 파일'에 따르면 1949년말 기준으로 남한 전역의 초등학교는 3천400개, 교사는 5만871명, 학생수는 291만5천650명이다.

교실의 수는 4만7천881개이지만 1만7천561개는 지붕도 없는 노천교실이다. 노천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학생의 수는 무려 122만9천270명에 달했다.

새로 지어져야 할 학교는 632개, 교실은 1만8천257개로 추산됐으며 이를 위해 교실당 200만원씩 총 365억원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이 파일은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규모의 자금 지원이 없이는 한국에서 초등학생의 의무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섭 파일의 평가다.

당시 초등학생 가운데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비율은 33%에 불과했으며 상급학교 학생 가운데 여학생의 비율은 25%에 그쳤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만 남녀공학이 허용되고 이후 대학교에서 다시 남.여학생이 함께 공부할 수 있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이상부터 대학진학 이전까지의 연령에 남녀공학을 하는 것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매우 분별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고 이 파일은 기술하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의 3분의 1은 여성이지만 서울에서 여성 교장은 단 1명에 불과했으며 남한 전역에서는 몇명 정도가 있었다.

모든 교과서는 일본어로 돼 있어 교육당국에서 한글로 된 새 교과서를 만들고 있지만 교사 등이 필사본으로 임의로 교과서를 만들려면 교육당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이 파일은 특히 일선 학교의 학부형회의 문제가 간단치 않다고 기술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학부형회는 미국의 사친회(PTA)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하지만 주된 기능은 교사들의 불충분한 급여를 보충해주는 것이며, 학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부유한 학부모들에 의해 적지않은 비리로 이어진다고 이 파일은 지적했다.

당시에도 남한 학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이 학부형회를 통해 교육현장에서 가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외국인의 눈에 포착됐다는 것은 흥미롭다.

당시 의과대학은 5곳이 있었으나 제대로 된 교과서가 없이 강의만 듣는 식으로 교육이 이뤄졌다. 실험실을 일부 갖추기는 했지만 일선 병원을 방문해 임상과정을 지켜보는 것으로 수련과정이 진행됐다고 파일은 설명했다.

제섭 특사가 당시 면담한 교육계 인사로는 훗날 서울대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최규남 문교부 직업교육국장, 이선근 서울대 법대학장, 윤일선 서울대 대학원장, 현상윤 고려대 총장, 김연준 한양대 학장, 한경직 목사, 장이욱 전 서울대 총장, 최두선 동아일보 사장 등이다.

제섭 특사는 당시 한국방문중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하고 국회에서 외빈자격으로 연설도 했다.

1897년 출생한 제섭 특사는 컬럼비아대학에서 국제법 및 외교학 교수를 지내고 1944년 브레턴우즈통화금융회의 사무차장, 47년 국제연합 국제법위원회 미국 대표를 거쳐 49년 무임소 대사로 임명돼 소련의 국제연합 대표와 교섭으로 베를린 봉쇄 해제의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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