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주위를 둘러보세요. 내 친구는 어디 있으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쩌면 친구의 집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지도 모릅니다. 거리낌없이 자신을 내보여 줌으로써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그 곳, 아주 자연의 세계인 그 곳에 말입니다.
네 명의 동네 꼬마 녀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친구가 된 데에는 아무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냥 같은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친구가 되었습니다. 친구이므로 그들 사이엔 어떠한 경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경계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거북이와 조오련이 경주한다면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토론에서 친구들은나뉘어 졌습니다. 준석(유오성 분)이와 동수(장동건 분)는 한 편이었습니다. 조오련의 세계와 바다 거북이의 세계는 '수면 위의 세계'와 '수면 아래의 세계'를 의미했던 것 같습니다. 조오련이 이긴다고 생각하는 상택(서태화 분)과 중호(정운택 분)가 수면 위의 세계에 있다면, 바다 밑에서는 거북이가 이긴다고 우기는 준석과 동수는 수면 아래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렇게 도저히 섞여들 수 없는 두 세계로 나뉘어진 그들을 소통케 하는 통로는,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오로지 '친구'라는 기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곽경택 감독은 그들 사이의 경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출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 개인의 운명에 따르는 것인지, 사회적 계급에 의해 강요되는 것인지, 타고난 성격에 의한 것인지...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친구'라는 말은 거의 초월적 성격으로 기능합니다. '관계'가 아닌 어떤 당위적 추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지요. "개안타, 우린 친구 아이가" 라는 대사가 바로 그 초월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지요.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라는 건너지 못할 경계선으로 나뉘어진 상택과 준석이 그 경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소통하는 지점이 바로 '친구'. 그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동수와 준석은 오히려 같은 지하 세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왜 '친구'라는 소통의 지점을 공유하지 못했을까요. 준석에 대한 동수의 열등의식 때문일까요. 장의사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열등의식 때문일까요. 수표에서 의리가 나온다는 동수의 보스 말대로 경제적 요인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두 조직의 세력 싸움에서 야기된 정치적 요인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힘과 힘은 충동할 수밖에 없다는 사회물리적 운명 같은 것 때문이었을까요. 그 모든 것 같기도 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친구'가 우리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 모호함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친구'라는 기호를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으로 격상시키면서 한편으론 친구마저 깔아뭉개는 돈과 권력의 메카니즘을 동시에 보여주니까요. '친구'를 보면서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 것은 '친구의 의미 찾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지하세계의 메카니즘이 지닌 폭력성' 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친구'는 전자로 영화를 살짝 포장해두었습니다. 그 포장술이 뛰어나 영화는 모호하게 보이는 것이고, 그 모호함에 취한 우리들은 안도의 비상구를 확보한 채 인간성 상실을 즐길 수 있는 것이겠지요. 경상도 사투리, 어눌하면서도 멍청해 보이고 그저 착해만 보이는 상택과 중호(어쩌면 현실에서는 지하세계의 친구들보다 더 야만적이고 이기적일 지상의 지식인 장사꾼들임에도), 흑백톤의 단순한 화면, 꽉 막혀서 숨막힐 듯한 지상의 세계와 오히려 열린 지하의 세계를 그리는 배경 등이 그런 포장술의 예일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준석과 그를 면회하러 온 상택이 꽝 하며 손바닥을 마주대는 대목은 상당한 떨림을 느끼게 했습니다. 비록 유리창으로 나뉘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마주 만나는 손바닥의 소통이 진정한 인간적 소통, 지하 세계와 지상 세계를 뛰어넘는 혹은 극복하는 그런 소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지요. 두 손바닥 사이에 가로놓인 유리창이 언제나 거두어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지만.... 어찌되었거나 이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친구'란 무엇인가 하는 케케묵은, 그러나 정답을 말하기는 어려운 오랜 수수께끼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됩니다. 참된 친구란 어떤 것일까요. 오래 사귄 사람 혹은 안지 오래 된 사람이 '친구(親舊)'라지만 오래됐다고 반드시 '친구'일 수는 없겠지요. 진정한 친구는 무엇일까요. 동수가 결국 죽을 것임을 안 준석은 동수를 죽입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당당하게 내가 시켰다고 말합니다. 그게 쪽팔리지 않는 길이라고 준석은 말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친구'란 자기 삶을 온통 실을 수 있는 그런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길을 우리는 현실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친구'는 그 길을 지하의 세계, 건달들의 몸부림에서나 볼 수 있다고 웅변하는 것 같습니다. 친구의 참된 존재적 가치, 그 존재적 집을 찾을 때 우리는 비로소 소통의 보금자리를 확보할 수 있겠지요. 주위를 둘러보세요. 내 친구는 어디 있으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그 집이 '무덤' 아니면 '감옥'이라면 우리의 삶이 너무 초라해 보이겠지요. 친구의 집을 어디에서 찾는 것이 좋을까요. 어쩌면 내 친구의 집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지도 모릅니다. 거리낌없이 자신을 내보여 줌으로써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그 곳, 아주 자연의 세계인 그 곳에 말입니다. /서혜정 hjkara@kft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