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급작스런 죽음과 그의 숨겨둔 정부(情婦)의 존재. 생계가 막막한 경제적 위기에서 불법인 줄 알면서도 손대는 대마초 재배. 이쯤 되면 아주 슬프고 논쟁적인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질 법도 한데, 영국 감독 나이젤 콜의 '오! 그레이스'(Saving Grace)는 시종일관 더할 수 없이 유쾌하게 진행된다. 웃음이 자꾸 새나오도록 만드는 부작용 없는 마약 같은 영화 '오! 그레이스'는 결국 아무리 처참한 일이 생겨도 다 살아가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 그룹 들국화의 전인권 씨가 "도대체 왜 국가권력이 다른 사람에게 해 끼치지 않고 개인이 행복해 하는 권리를 마음대로 뺏는가"란 말을 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대마초를 피우는 것 자체는 자신의 감정이나 사생활 문제이며,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해가 안 가는 이상 그 것을 피웠다는 자체를 법적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따라서 마약을 상용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 처벌을 해야하는 것과는 구별지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영화 '오! 그레이스'를 보며 전인권 씨의 주장이 떠 오른 건 대마초를 재배하고 파는 인간이 가장 순진하고 섬세했던 마을의 인기 아줌마였다는 것과 콘월마을 사람 대부분이 별다른 죄의식 없이 대마초를 흡입하고(심지어 목사와 경찰관조차 묵인하면서) 행복해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대마초 태운 연기가 온 마을로 번지며 그걸 흡입한 사람들이 춤추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곤 대마초 흡입=범죄란 우리의 '상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것이지요. 사실 대마초를 비롯한 환각제의 상용은 인류역사이래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왔죠. 로마시대엔 십자가형을 받을 때 그 고통을 덜기 위해 환각제를 탄 물을 마셨고, 중세까지도 고통을 덜어주는 민간요법 진통제로써, 무당의 신적 교감을 위한 필수 도구로써 환각제는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지요. 최근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 주거지 발굴에서도 환각제 흡입을 위한 도구가 발견됐다고 하니까요. 또 예술가들에게 환각제는 '지성을 고조하고 신적 영감의 경험을 주는 원천'이란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지요. 특히 19세기 '낭만주의' 시대 유럽과 미국의 지성계는 '약물의 시대'라 불릴 만큼 환각제 흡입이 유행이었습니다. 보들레르나 랭보, 바이런과 스티븐슨, 애드가 앨런 포, 헤르만 헤세, 프로이트 등이 다 환각제 상용자였으니까요. 학자들은 환각제 사용 원인을 초월적인 것을 지향하는 인간의 욕구, 자신의 생활에 대한 불안과 사회적 공포를 느끼는 사회인들의 도피 욕구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1960년대 미국의 히피운동 대부 티모시 리어리가 '사이키델릭(psychedelic)'이란 단어를 말한 이래 베트남 반전운동과 급진개혁운동을 했던 유럽과 미국의 68세대들은 '환각제 속에서 진리를' 찾는 '초월여행'을 경험 했었죠. 우드스탁 공연 등 당시 가수들에겐 대마초가 필수품이었고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 '대마초파동'이 일어나기도 했었지요. '오! 그레이스'에는 마약에 대한 수요가 일상화 된 유럽사회에서(네덜란드나 스위스는 일부 판매와 상용을 합법화했죠) '타인에 해 끼치지 않고 개인만의 행복한 감정을 위해 대마초를 흡입하고 공급하는 것 정도는' 용인해도 되지 않느냐는 마약문화에 대한 '영화적 수용'이 담겨있는 듯 합니다. 아무튼 마약에 대해 강경한 우리 사회에서 '대마초 흡입으로 행복감의 일단을 맛보는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영화 '오! 그레이스'는 무척 낯설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힘든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 쾌락과 초월로의 일탈, 개개인의 몸에 대한 권리승인을 이렇게도 볼 수 있다'는 영화적 시선이 신선함을 준 것만은 사실입니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니까요. /서혜정 hjkara@kft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