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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시인이여, 선운사 동백꽃이 아직 그리운가

(3)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를 간직한 전북 고창



서정주는 고창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초기 시의 대표 시집인 <화사집>과 <귀촉도>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을 썼다. 또 <질마재 신화>로 대표되는 후기 시 역시 고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늦가을. 미당 서정주 문학의 시작과 끝이 있는 곳, 고창으로 그를 찾아 나선다.

선운산 나들목에서 서정주 생가의 약도를 받아 들고 734번 지방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고창을 찾았던 10여 년 전을 생각해 보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고속도로가 생겨났고, 문화에 대한 높은 인식으로 세심한 노력을 쏟는 지자체의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논과 밭, 그리고 멀리 야산이 펼쳐진 들길을 달려간다.




미당시 문학관과 복원된 생가
시인의 고향인 선운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답사객을 맞는 것은 ‘미당시문학관’이다. 문학관에는 서정주 시인의 유품과 육필원고, 발간된 시집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고 논쟁의 씨앗이 되었던 친일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2001년 11월에 개관한 미당시문학관은 폐교가 된 선운분교를 인수하여 조성을 했는데 그 규모가 국내에서는 가장 크다. 이곳에는 시인이 사용하던 가구와 유품, 육필원고와 시집 등 총 1만 5000여 점의 전시물이 있다고 한다. 문학관 중에서는 가장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셈이다. 중앙에는 4층짜리 전망대 모양의 건물이 있는데 각 층마다 작품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고 작은 창문을 통해 시인의 생가와 선운리 일대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다.

미당시문학관을 돌아보고 해설사 서동진님의 안내를 받아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생가는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1942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친척이 거주하면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하였고 1970년 이후에는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흉물스럽게 방치되다가 서정주 시인의 사후인 2001년 8월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이 되었다. 복원된 생가 마당의 우물 뒤편으로 장독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어 제법 시골 마을의 정취가 묻어난다. 그 옛날 툇마루에 앉아 할머니 손을 잡고 도란도란 옛날이야기를 듣던 아홉 살 어린 꼬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10여 년 전 처음 동료 교사들과 생가를 방문했을 때에는 이웃에 서정주 시인의 친동생인 서정태 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향마을에서 난을 기르며 혼자 거주하던 서정태 시인의 안내를 받아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생가를 돌아본 적이 있었다. 은은한 녹차를 내 놓으며 다정스레 서정주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민족현실 외면 평생오점으로
서정주는 중앙고등보통학교 2학년인 1930년에 광주학생운동 일주기를 맞아 기념 시위를 주도하며 항일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다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고향인 고창 선운리로 돌아온다. 당시 서정주의 아버지 서광한은 중앙고등보통학교의 소유자인 인촌 김성수의 집에서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농을 관리하는 농감(農監)겸 비서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서정주는 아버지가 인촌의 집에서 농감으로 일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요구했고, 그는 아들의 뜻을 따라 농감을 그만두고 고창읍내로 이사를 한다. 그러나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 서정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학교의 요구에 따라 자퇴를 한다.

10대의 서정주는 꽤나 반항아였다. 주로 할머니 품에서 자란 것에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반항은 가출과 방랑으로 이어진다. 빈민촌에 입주하여 넝마주이 생활을 하고, 서울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다. 이 시절에 니체, 고리끼 등을 공부하고 사회주의와 인도주의에 빠져 사상적 방황을 겪기도 한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경험은 미당 서정주의 작품세계에 견고한 뿌리가 되었다.

광주학생운동 기념시위를 주동하며 항일운동의 깃발을 들었던 서정주가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국민문학’의 편집을 맡은 1943년부터이다. ‘국민문학’은 최재서가 창간한 친일 문학잡지로 문인들을 동원하여 황국신민화와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20대 젊은 나이의 서정주는 이때부터 역사와 민족의 현실 문제에서 회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 사회 정치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일제강점기의 친일 인사에 대한 평가가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에 미당시문학관에는 시인의 대표작과 일제 말기에 쓴 친일 작품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시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사회단체의 비판이 거세지고 문학관 건립에 반대하는 여론이 제기되자 유족과 문학관 관계자들은 대표적인 친일 작품인 <오장 마쓰이 송가> 등을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여 국민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민족의 현실에 대한 외면과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평생의 오점으로 남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국화꽃으로 뒤덮인 질마재
서정주 시인의 문학과 삶의 토양이 되었다는 질마재. 서정주 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를 가리키는 말로 ‘말이 짐을 지고 넘어다니던 고개’라는 뜻이다. 질마재는 부안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4㎞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방장산과 두승산, 변산으로 이어지는 삼신산의 모산인 소요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형상이다. 마을 앞에는 넓은 벌이 펼쳐져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요즘 질마재는 국화꽃으로 덮여 있다. 시인을 사랑하는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생가와 문학관 마당에 국화가 심어졌고, 시인이 잠들어 있는 문학관 옆 산기슭에도 국화꽃이 가득하게 심어져 가을이 되면 온 산이 노랗게 물들 것이다.



날이 저물어가면서 선운사로 향하는 발길이 바빠진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 입구에는 서정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선운사에는 대웅보전을 비롯한 보물과 송악, 장사송 등 천연기념물, 기타 지방문화재를 비롯한 귀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데, 대웅전 뒤에 있는 수령 500년 정도 된 동백나무는 군락을 이루며 절을 호위하고 있어 봄에 선운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동백꽃의 아름다운 장관을 선사한다. 또한 선운사 입구에는 백제가요인 『선운산가』비와 서정주의 시비 『선운사 동구』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고창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유구한 문화를 간직한 관광의 도시로 손색이 없다. 서정주 시인이 노래한 동백꽃과 상사화, 단풍과 설경으로 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아름다운 선운산과 판소리의 고장답게 동리음악당과 판소리박물관이 있는 전통문화의 고장이다.

시인의 육필 원고를 그대로 옮겨 놓은 시비 <선운산 동구>를 읽으며 오늘도 저녁노을 속에서 고창의 하루를 접는다.

■ 문학답사를 위한 여행 코스
고창 도착 ⇒ 질마재(선운리) ⇒ 미당시문학관 ⇒ 서정주 생가 ⇒ 서정주 묘소 ⇒ 선운사 시비 ⇒ 선운사 ⇒ 고창 출발

■ 가는 길
- 고속버스(서울-고창)=매일 16회 운행 (요금 15.300원) 소요시간 약 3시간 소요.
- 기차(서울-정읍-고창)(용산-정읍)=매일 11회 운행(무궁화호 요금 성인 18.100원) 3시간 42분 소요. 정읍-고창 버스이용(요금 2.000원)
- 승용차(서울-고창)=서해안고속도로 이용 선운산 나들목에서 22번 국도를 타고 부안면 소재지를 지나 734지방도로로 진입.

■ 문의
고창군청 문화관광과=(063)560-2227
미당시문학관=(063)560-2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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