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바위 하나, 풀 한 포기조차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화를 이룬 풍광. 녹우당이 있는 연동마을, 현산고성 주변을 원림으로 조성하고 풍류를 즐겼다는 금쇄동과 문소동, 수정동. 세속의 뜻을 버리고 정착하여 노후를 보낸 보길도 부용동. 시 속에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빚어낸 남도의 끝자락 해남을 찾아 나선다. 고산 윤선도와 관련된 유적지로는 생가 터인 서울 연지동과 명동성당 앞의 집터, 고산이라는 호를 짓게 된 남양주시 수석동, 유배 생활 중에 황학대를 즐겨 찾던 부산 기장군 죽성리, 간척 사업을 통해 백성들의 어려운 생계를 해결해 준 진도군 굴포리, 유배지였던 경북 영덕군 우곡리와 전남 광양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적지들이 주로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정해진 곳이었다면 고산 문학의 산실인 해남은 자연을 사랑한 시인 스스로가 선택한 곳이기에 그 가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 해남까지는 승용차로 달려도 6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이다. 녹우당까지는 이미 답사 경험이 있지만 이번 답사는 땅끝마을을 지나 보길도까지를 일정으로 삼았다. 호남고속도로를 따라 광주, 다시 나주와 영암을 지나 해남을 향해 달려간다. 넓은 들녘을
서정주는 고창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초기 시의 대표 시집인 과 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을 썼다. 또 로 대표되는 후기 시 역시 고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늦가을. 미당 서정주 문학의 시작과 끝이 있는 곳, 고창으로 그를 찾아 나선다. 선운산 나들목에서 서정주 생가의 약도를 받아 들고 734번 지방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고창을 찾았던 10여 년 전을 생각해 보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고속도로가 생겨났고, 문화에 대한 높은 인식으로 세심한 노력을 쏟는 지자체의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논과 밭, 그리고 멀리 야산이 펼쳐진 들길을 달려간다. 미당시 문학관과 복원된 생가 시인의 고향인 선운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답사객을 맞는 것은 ‘미당시문학관’이다. 문학관에는 서정주 시인의 유품과 육필원고, 발간된 시집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고 논쟁의 씨앗이 되었던 친일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2001년 11월에 개관한 미당시문학관은 폐교가 된 선운분교를 인수하여 조성을 했는데 그 규모가 국내에서는 가장 크다. 이곳에는 시인이 사용하던 가구와 유품, 육필원고와 시집 등 총 1만 5000여 점의 전시물이 있다고 한
벽초 홍명희의 고향인 괴산에 들어서면 험상궂은 모습보다는 다소 귀엽게 표현된 임꺽정의 캐릭터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의적이라면 모름지기 칼이나 굵은 몽둥이 정도는 들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괴산의 특산물을 어깨에 들러낸 모습이 어찌 보면 소박한 농민의 대변자 같다. 오늘은 의 저자 홍명희를 찾아간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세상이 어수선하고 가난한 민중들이 권력자의 횡포로 핍박을 받을 때마다 민중의 편에 서서 홀연히 나타나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 역시 가장 설움을 받아온 민중이지만 ‘빈민구제, 탐관오리 응징, 이상향 건설’을 꿈꾸며 칼과 죽창을 들었고, 우리는 그들을 의적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의적으로는 홍길동(洪吉童)과 임꺽정(林巨正), 그리고 장길산(張吉山)을 들 수 있다. 조선조의 대학자인 성호 이익(李瀷)이 그의 저서인 에서 이 세 사람을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평범한 일개 도적의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의적들은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한낱 화적패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 민중의 영웅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3대 의적 임꺽정…칠장사 이 세 의적의 이야기는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