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바위 하나, 풀 한 포기조차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화를 이룬 풍광. 녹우당이 있는 연동마을, 현산고성 주변을 원림으로 조성하고 풍류를 즐겼다는 금쇄동과 문소동, 수정동. 세속의 뜻을 버리고 정착하여 노후를 보낸 보길도 부용동. 시 속에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빚어낸 남도의 끝자락 해남을 찾아 나선다.
고산 윤선도와 관련된 유적지로는 생가 터인 서울 연지동과 명동성당 앞의 집터, 고산이라는 호를 짓게 된 남양주시 수석동, 유배 생활 중에 황학대를 즐겨 찾던 부산 기장군 죽성리, 간척 사업을 통해 백성들의 어려운 생계를 해결해 준 진도군 굴포리, 유배지였던 경북 영덕군 우곡리와 전남 광양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적지들이 주로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정해진 곳이었다면 고산 문학의 산실인 해남은 자연을 사랑한 시인 스스로가 선택한 곳이기에 그 가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 해남까지는 승용차로 달려도 6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이다. 녹우당까지는 이미 답사 경험이 있지만 이번 답사는 땅끝마을을 지나 보길도까지를 일정으로 삼았다. 호남고속도로를 따라 광주, 다시 나주와 영암을 지나 해남을 향해 달려간다. 넓은 들녘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문화 유적을 알리는 이정표가 조밀하게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호남이 유구한 문화의 중심지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고산의 유적이 산재한 해남땅
해남은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고산 윤선도의 고장이라고 할 만큼 그와 관련된 문화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해남읍에서 가까운 곳으로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이 있는 연동마을, 현산고성 주변에 원림을 조성하고 정자와 각을 지어 놓고 풍류를 즐겼다는 금쇄동과 문소동, 수정동 유적지, 세속의 뜻을 버리고 제주도로 은둔을 하려다 보길도의 아름다움에 빠져 정착하여 노후를 보냈던 보길도 부용동 등 어느 곳 하나 그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윤선도는 이곳을 왕래하며 그의 문학 속에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빚어 넣었다.
해남읍에서 대둔사로 향하는 806번 지방도로를 따라 4㎞ 정도 달리면 왼쪽으로 덕음산 자락에 자리 잡은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이 있는 연동마을을 만날 수 있다. 원래 이곳은 해남 윤씨 녹우당으로 사묘와 제단이 있어 사적 167호로 지정된 곳이다. 녹우당에는 윤씨의 종가인 녹우당과 고산사당, 어은초의 묘와 사당 등이 있다.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고택은 지금도 후손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고택 앞에는 윤선도가 이곳에 거주하면서 심었다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마치 고택의 수호신 마냥 늠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유적관리사무소 뜰에는 <어부사시사>가 새겨진 시비가 있어 문학도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시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배경으로 한 작품씩 새겨져 있다. 시 구절을 읽다 보면 고산의 자연에 대한 정취가 그대로 손끝에 묻어나는 것을 느낀다.
윤선도는 십여 년의 유배 생활과 낙향, 자연 속에서의 은둔 생활을 통해 우리 국문학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인 당대 최고의 문학가로 평가받고 있다. 한시에도 뛰어났지만 한글 시조를 통해 국어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휘한 당대 최고의 국문학 작품을 남겼다. 금쇄동에서 쓴 <오우가>와 보길도 부용동에서 쓴 <어부사시사>는 국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그는 유교 사상에 불교와 도교인 노장 사상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적 사상을 완성하였으며 마치 신선처럼 자연과 동화된 삶을 추구하며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완성하였다. 윤선도의 삶은 곧 문학이라고 할 만큼 그는 풍부한 감수성과 진솔한 삶을 문학으로 꽃피운 시인이었다.
오우가와 어부사시사의 고향
이러한 고산 시가 문학의 원천은 자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세상의 혼탁한 현실보다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선택한 시인으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공존하고자 했다. 그는 부용동과 금쇄동 같은 원림을 조경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서구의 조경이 인위적이고 조작적이라면 동양의 조경은 자연의 바위 하나, 풀 하나가 자연의 섭리를 저버리지 않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어 시공을 초월하는 풍광을 엮어내는 것이다. 특히 윤선도가 조성한 보길도의 부용동은 담양의 소쇄원,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으로 불릴 정도로 천혜의 자연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유명하다.
다음날 보길도로 출항하는 첫 배를 타기 위해 새벽에 눈을 떴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승선 준비를 하고 있다. 해상왕 장보고의 이름을 단 여객선은 힘찬 고동소리와 함께 선착장을 빠져나와 넓은 바다를 향해 힘찬 물질을 시작한다. 다도해의 아침 풍경은 살아있는 바다 냄새를 물씬 토해내고, 물살에 비껴가는 작은 섬들이 점점이 눈에서 멀어져 간다. 그렇게 40여 분을 달렸을까. 배 앞머리로 보길도의 관문인 청별항이 시야에 들어온다. 눈앞에 펼쳐진 보길도의 아름다운 전경을 바라보면서 윤선도가 왜 이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짐작하게 되었다.
청별항에 도착하여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보길도에 대한 관광 안내도를 건네주며 여행 코스까지 설명해 주는 아저씨. 친절한 시골 아저씨에게서 넉넉한 마음과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함께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보길도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는 곳은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들이다. 청별항에서 세연정, 고산 윤선도 문학체험공원, 동천석실, 낙서재, 곡수당 등을 둘러보는 코스야말로 윤선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일 것이다.
처음 도착한 곳은 산 중턱의 바위 위에 올라앉은 동천석실이다. 개울을 건너 우거진 나무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오른다. 산새들의 지저귐이 더 없이 정겹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신선들이 거주한다는 동천(洞天)의 의미가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석문, 석제, 석천, 석폭, 석대, 석교 등 다양한 이름을 지닌 자연 그대로의 정원을 지나면 바위 위에 터를 잡은 한 칸짜리 정자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윤선도는 동천석실을 부용동 제일의 절경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부용동의 전경이나 격자봉의 모습은 자연에 은둔한 노인을 시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으리라. 이곳을 수시로 찾아와 책을 읽으며 신선처럼 자연을 벗 삼아 소요했을 윤선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보길도의 참모습을 찾다
낙서재는 윤선도가 보길도에 정착하면서 제일 먼저 지은 건축물로 살림집이라고 한다. 현재는 집터와 무너진 돌담만이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알기는 어렵지만 발굴팀에 의하면 그 규모는 제법 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윤선도는 낙서재에서 주로 생활을 했으며 생애의 마지막도 이곳에서 마감하게 된다. 낙서재는 격자봉의 소은병 아래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골짜기와 산봉우리는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낙서재우음(樂書齋偶吟)>이라는 한시를 보면 낙서재가 강학과 독서를 즐기며 은둔하고자 했던 선비의 공간이었음을 알게 한다.
세연정(洗然亭)은 우리나라의 삼대 정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원림이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롭게 결합된 이곳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계곡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이 모이는 세연지(洗然池)와 그 옆에 인공 연못으로 조성한 회수담(回水潭)이 다투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윤선도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연못에 암석으로 섬을 만들어 혹약암, 유도암, 사투암, 귀암 등의 이름을 짓고 연못에 배를 띄워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두 연못 사이에는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은 세연정(洗然亭) 터가 있었는데, 1992년에 원형이 복원되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세연정 뒤쪽에는 최근 윤선도의 시비가 세워졌다. 둥근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어부사시사>를 계절별로 적어 놓아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시인의 안빈낙도하던 삶을 되새기게 한다. 그 외에도 무희들이 춤을 추었다는 동대와 서대, 귀암 위에 설치된 비홍교, 국내 유일의 석조보인 판석보는 유적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되고 있다.
유적관리사무소 맞은편에 있는 고산유물전시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주변 경관을 고려하여 단층 한옥 건물로 지어진 유물전시관에는 주로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선생의 관련 유품과 작품 4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제240호)과 해남윤씨 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윤고산 수적 및 관계문서(보물 제482호), 지정 14년 노비문서(보물 제483호) 등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은 유물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