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살아가는 ‘루소’와 ‘헤르바르트’들이여, 황금에 배팅하는 시대에 우리는 교육에 목숨 걸어야 한다. 이게 우리의 첫사랑이자 운명이기에 그렇다."
수업하러 교실 문을 여는 순간, 그 상황이란 옛날 동네 서커스를 보러갔을 때 기억을 방불케 한다. 커튼을 쳐놓은 상태에서 교실 형광등은 꺼져 있고 여기저기 엎드려 자는 아이들과 삼삼오오 책상에 걸터앉아 떠드는 아이들. 스위치를 켜면 바닥에 점점이 버려져 있는 휴지와 과자 봉지들, 서커스가 시작되려면 아직 먼 모양이다.
나는 큰 소리로 막이 올랐음을 알린다. 그러나 그 소리는 소음에 묻히고 결국 작은 지휘봉으로 교탁을 두드려 관객을 집중시킨다. 그제야 선생의 무대 등장을 깨닫고 서있던 아이들이 객석에 앉는다. 자다 깨어난 또 다른 아이는 어슬렁거리며 납골함 같은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온다. 그래도 다행이다. 여전히 앞뒤로 히죽거리며 떠드는 소리는 가라앉지 앉는다. 오랜만에 만난 동네 친구들처럼 흥겹다.
배우는 처음부터 핏대 올려 시작할 필요 없다. 그냥 관객의 소리와 신체마임을 구경하면 된다. 무대와 객석이 바뀐 셈이다. 한참 후에 누군가 내지르는 소리, “야! 조용히 해!” 그제야 아이들은 자신의 시간이 3교시에 와있음을 알아챈다. 다양화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아이들의 욕구와 인권도 각인각색이다. 자는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꺾은 채 자고 있다. 더 이상 잔소리는 효험이 없다. 식상한 모노로그를 시작하면 분명 1막 3장의 잔소리 극으로 끝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앞자리에 눈이 초롱초롱한 아이가 나를 예의 주시한다. 관람하는 태도가 좋다. 수준 높은 관객이 훌륭한 배우를 만드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 갈급한 몇 명의 눈망울을 위한 나만의 연기가 펼쳐진다. 거침없이 소리의 강약을 주어가며 더러 휘몰이로 더러는 진양조로 객석을 압도한다. 1인 3역을 하며 다중인격, 복화술까지 선보인다. 그래도 자는 아이는 여전히 꿈속에서 돌아올 줄 모르고 델타파의 신호만 방출한다.
관객모독이 아닌 무대모독을 생각하며 나는 서랍 속 우황청심환을 떠올린다. 문득 혈압에 이상이 있지 않는가 걱정을 한다. 배우는 몸으로 먹고사는 ‘노가다’인데 몸이 망가지면 큰일 아닌가. 성대 결절 또는 하지정맥류라도 생기면 끝이다. 불현듯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동창의 부고 문자가 가슴에 뜬다. 그러고 보니 콩팥과 간, 위장과 허파가 자신이 없다. 노후한 차량처럼 카센터에라도 가봐야 하는가. 잠시 판서를 멈추고 창밖을 본다. 하늘엔 푸른빛이 흐릿하고 구름이 무상하다.
요즘은 수업이 전투고 생활지도도 전투다. 손톱 깎아라, 복장 단정히 해라, 수행평가를 제대로 해라 등등 신경전이 일상화되었다. 휴전하면 편하다. 수업을 듣건 말건 사고를 치건 말건 너는 너 나는 나 하면 선생은 편하다. 수업시간에 노트북 가지고 들어가서 자료화면만 클릭해주다가 애들이 심드렁해 할 쯤 동영상 하나 보여주면 끝난다. 지금은 이미지와 영상의 시대니까, PMP로 야동과 야설을 탐구하며 문명의 진보에 발맞추면 좀 어떤가.
정말 휴전하는 선생이 늘어간다. 아이들이 색조화장을 하고 치마가 짧아져도, 거짓말을 하며 선생에게 따져도, 애들끼리 왕따와 폭력이 일어나도 초연하다. 아이의 가정에 심각한 일이 있어도 물어볼 필요도 없다. 행동장애나 심신장애로 괴로워해도 그저 특이행동만 면박을 하면 그만이다. 따뜻한 차 한 잔, 따뜻한 밥 한 끼를 같이 하며 품으로 끌어안는 선생은 고리타분하다.
환자에게 실력과 신뢰를 겸비한 의사가 절실한 것이라면, 바른 삶을 살고자 교실에 와있는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선생은 아이들을 인술로 돌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희망 설계사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그렇게 놔주질 않는다. 밤이면 네온사인이 번득이고 밤늦게까지 부모는 자본주의의 치마폭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선생도 시간이 끝나면 세상 밖으로 사라지고 그리하여 ‘루소’는 없다.
물질적 욕망이 출렁거리는 세상에 어쩌면 우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고 있는지 모른다.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눈을 뜨기 힘든 상실의 시대. 황금을 찾아 엘도라도로 떠난 부모는 돌아오지 않고, 아이들은 게임으로 들어가 나오지를 않는다. 가정이 해체되고 아이들의 미래가 분해된다. 푸르른 숲 위로 태양이 떠오르건만 아이들은 여전히 그믐밤이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 미래에 대한 도면이 없는 시대.
교육학 한 권 윤리학 한 권을 읽지 않고 살아가는 ‘결손’의 시대에 우리는 산다. 선생마저 게으르고 나침반이 없다면 이 ‘결핍’을 감당할 수 없다. 세상이 황금에 배팅하는 시대에 우리는 교육에 목숨 걸어야 한다. 가슴 찡하게 종아리도 때리고 보듬고 울어도 봐야 한다. 이게 우리의 첫사랑이자 운명이기에 그렇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루소’와 ‘헤르바르트’들이여, 교육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어야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