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말’의 홍수시대. 책에서, 신문에서, TV에서, 인터넷에서 말은 넘치고 또 흘러 넘친다. 하지만 가슴을 적시고 마침내 가슴에 고여 정신의 가뭄을 해소해주는 말은 드물다.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간 스님들처럼 묵언정진(默言精進)해야 한다는 강박감마저 드는 요즈음, ‘춘아, 춘아…’(민음사)는 말이 얼마나 아름답고 생산적일 수 있는지 새삼스럽게 보여준다. 단 한 권의 책을 통해 이처럼 많은 지성들의 울림 깊은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춘아, 춘아…'는 무가(巫歌) 의 한 대목이다. 반복되는 가락이 절묘하게 풀려 가는 다음 대목을 마저 읊어보면... "우리 아버지 배를 타고 한강수에 놀러갔다. /봄이 오면 오시겠지? 봄이 와도 안 오신다. /꽃이 피면 오시겠지? 꽃이 펴도 안 오신다…. "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 가락의 창자(唱者) 는 아마도 아버지 생전에 함께 배를 타고 한강수 물놀이를 한 적이 있는지 모른다. 깊숙한 그리움 속에 담긴 죽음의 되새김질이 점점 깊어지면서, 그 가락을 읊고 듣는 이 모두 자연스레 눈물을 짓게 된다. 무가(巫歌) 의 주인공 '옥단춘' 을 '한국인' 으로, '아버지' 를 '우리 문화' 혹은 '인문학' 으로 바꿔 노래를 불러본다면, 이런 글이 나오지 않았을까. '우리 시대의 삶과 꿈에 대한 13가지 이야기' 라는 부제를 단 '춘아, 춘아…'는 주목받는 지성 26명이 이 땅에서 사는 슬픔과 아쉬움을 노래한 13편의 맛깔스러운, 그리고 속 깊은 변주곡이다. 계간지 '세계의 문학' 100호 발간기념 기획물로 펴낸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대담자 조합의 의외성’과 이를 통한 ‘익숙한 주제의 낯선 결합’에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노학자와 이제 막 필력을 과시하는 소장학자가 만나고, 중문학자와 디지털학자, 음악학자와 미술가, 스님과 목사가 흉금을 터놓는다. 이런 탈(脫)세대, 간(間)학문, 혼(混)영역의 이질적인 마주침은 의외의 ‘불꽃’을 일으킨다. 정재서 교수(이화여대 중문학)와 김주환 교수(연세대 신문방송학)가 일본 만화영화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하이브리드’(잡종) 캐릭터의 근원을 중국 신화 ‘산해경(山海經)’에서 발견한다거나, 양명수 목사와 도법 스님이 다른 구도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종교는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라는데 기꺼이 합의하는 것이 그렇다. 생명의 탄생을 찬양하는 최재천 교수(서울대 생물학과)와 죽음을 노래하던 최승호 시인은 어떤가. 얼핏 불협화음 같은 두 사람의 결합은 “죽음 역시 삶 속에 있고, 삶은 죽음을 끌어안을 줄 안다”는 선(禪)적 합일을 이룬다. 불꽃’이 만든 지혜의 결정을 한데 모으면 시대를 비추는 ‘성찰의 거울’이 된다. 이 책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의 방패’에 비유한 것은 편집진의 자찬(自讚)만은 아니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기 위해 방패로 괴물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듯, 이 책은 삶을 화석화시키는 주의와 주장을 되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계기를 제공한다.“정승처럼 벌어야 정승처럼 쓸 수 있다.”(소설가 최인호·윤윤수 필라코리아 대표) “사람은 땅을 닮고, 땅은 사람을 닮는다.”(풍수학자 최창조 교수·`한국의 주체성` 저자 탁석산) 같은 결론은 이런 점에서 적잖은 울림을 남긴다. 이밖에 "나는 네(딸 이다희)가 아프리카 가수에게 뿅가서 나처럼 학교 때려치고 스와힐리어를 배우겠다 해도 말리기는커녕 박수치겠다" 는 이윤기씨(소설가), “데카르트를 극복해야 된다는 어떤 분의 말씀에 ‘언제 데카르트 적인 것이 있었어야 극복을 하지, 데카르트 적으로 극복하고 자시고도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극복하느냐’고 얘기한 김우창(고려대 영문과)교수, “우리나라는 아직도 근대성을 획득하지 못한 게 문제예요. 그런데 벌써 탈 근대를 얘기하면 굉장한 지적 혼란을 느낍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헝클어뜨리고 혼란시키지 않나 해서요. 이성을 통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압도적으로 많아요”라고 첨단 흐름만 쫓는 기성 계에 경고를 울리는 최장집(고려대 정치학) 교수, 김화영(고려대 불문과)교수와 소설가 이문열씨의 '70점 짜리 문학은 가라' 등으로 이어지는 이 책은 어느 대목을 붙잡아도 챙겨갈 것이 있는 순도 높은 책이다. /서혜정 hjkara@kft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