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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교사론> 교사의 해외 파견 연수 - 루소, 오바마 그리고 인도

“독서를 통해 얻은 간접 경험과 인생과 삶에 대한 풍부한 직접 경험을 지닌 교사라야 ‘에밀’과 같은 학생들에게 다가설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사의 해외 파견 같은 직접 경험은 교육을 위한 풍성한 자양분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학기말의 와중이라 스쳐 지나갔지만, 지난 2월 8일자 도하 언론을 통해 일제히 보도된 내용이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교사들의 글로벌 교육역량 강화를 위해 2015년까지 총 1만여 명의 현직 및 예비교사에게 해외파견 및 연수, 외국 교사자격증 취득 등의 기회를 준다는 보도이다.

만시지탄이지만 그 취지에 대해 전적으로 환영한다. 그간 놀랍도록 성장한 우리의 국격이라든가 경제력에 비해, 교육의 글로벌화를 위한 교사들의 해외 연수 기회는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해외 교육 정보를 얻고자 하는 노력, 해외 교육 수준에 대한 탐방 등의 자비 연수조차도 외화 낭비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시절도 있었다. 교과부의 이번 발표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좀 더 보완만 된다면 교사들을 위한 훌륭한 연수 프로그램으로 기능할 것이다. 이와 연관해 내게 두서없이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이 있다. 루소, 오바마 그리고 인도이다.

주지하다시피 루소는 명저 ‘에밀’을 통해 교사의 역할을 제시했다. 교사는 우선 에밀이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학습 과정을 하도록 유도한다. 교육 과정은 ‘자연스러움’을 최대로 반영하고, 교사의 훈도에 의해 사회적 영향에서 독립해 스스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인지 능력을 갖춰나가도록 유도한다. 이후 독서로 간접 경험의 기회를 갖게 된다. 에밀이 14세가 되자, 교사는 지금까지의 모든 직접 간접 경험들이 결국 그를 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자발적인 노력이었음을 깨닫도록 인도한다. 이로써 에밀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역사나 신학,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게 되며,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단언컨대, 교사의 노련하고도 풍부한 경험과 연륜이 없다면 ‘에밀’을 적절하게 교육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독서를 통해 얻은 간접 경험과 인생과 삶에 대한 풍부한 직접 경험을 지닌 교사라야 ‘에밀’과 같은 학생들에게 다가설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사의 풍부한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과 해외 파견의 연수와 여행과 같은 직접 경험은 교육 행위를 위한 풍성한 자양분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교사의 교육적 역할은 교사 개인이 지닌 경험적 인식과 밀접히 연관된다. 지난 겨울방학에 필자는 교사 6명을 인솔하고 인도 중북부를 다녀왔다. 2월 초의 구정 연휴까지를 활용한 20여 일의 적지 않은 여정이었다.

해외 오지에서 그간 필자는 많은 교사들을 만났다. 인도의 경우, 거리의 구루로부터 히말라야 산맥의 동굴서 평생을 수행하는 개인 수행자들은 명상을 교사로 삼아 철저히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대도시 사립학교의 교사에서 시작해, 시골 공립학교의 교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사들은 당면한 교육 과제로 인해 부심하고 있었다. 많은 경우 극심한 문맹률과 가난의 문제, 그리고 대량 교육의 부담과 엘리트 교육의 과제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교육의 당면 과제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그들조차도 중요한 핵심 과제에 이르면 자신이 믿는 종교적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이다.

첸나이 출신의 교사 루크 자와라얄(LUKE JAWARAWAL)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우리는 진지하게 미래를 걱정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힌두는 힌두대로, 무슬림은 무슬림대로 산다. 시크는 시크대로 부디스트는 부디스트끼리 산다. 자인은 자인대로 파르시는 파르시대로 자신의 세계로 회귀하고 만다. 여기에 국가는 없고 지역과 종교만이 남는다.” 한 개인의 각성이 국민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장을 목격한 순간이다. 그간 델리와 뭄바이에서 대입에 대비한 사교육의 열풍과 총탄을 피해 등교하는 히말라야 산간마을 스리나가르의 학생들을 보았다. 이로써 빈곤 문제와 종교 갈등에 옥죄여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를 곱새기게 되었다.

교과부의 이번 구상을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런 구상조차도 용두 사미격의 ‘빛 좋은 개살구’가 되지 않나 솔직히 염려된다. 그간 검증 안 된 정책으로 교단의 황폐화를 불러들이고 난 후, 교육 당국이 흘리던 선심성 정책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중이야 어찌 되었든 인기몰이 식으로 한 방 터뜨리는 행태를 말하고자 함이다. 필자는 이렇게 불쾌하게 학습된 기억을 우려하고 있다.

공자는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교사가 있게 된다. 그 잘하는 교사는 선택해 따르고, 그 잘 못하는 교사는 선택하지 말아 고치면 된다”고 했다. 그 잘하는 선택교사로 삼든, 불선택의 반면교사로 삼든 우리 주변을 넘어서 밖을 살피고자 하는 교육적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잠시 뒤집어 바라보자. 오바마는 우리 교육 현장을 자꾸 공식석상에서 언급하곤 한다. ‘나는 교사이다’를 되뇌는 필자의 입장에서 참으로 손발이 오그라들며 민망해지는 순간이다. 변화 요구에 대한 신속한(?) 환류 체계, 그리고 교육 현장의 요동치는 역동성에 대한 피상적 관찰이 나은 결과라 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 교육을 그네들이 선택 교사로 보든 반면교사로 보든 이제는 외부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이제 세상은 지구별의 운명으로 한 공동체가 되어 돌고 돌고 또 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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