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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유학(儒學) 통해 인간다움의 최고 경지 추구

① 조선시대 : 국가가 안내한 유학, 기술, 여성 교육과정

유학교육 : 국가수준 교육과정 규정·규칙 정해놓고 교육
기술교육 : 전문 분야 교육 위해서 태종 때 ‘십학’ 설치
여성교육 : 가부장제 유지하기 위해 ‘열녀’, ‘내조’ 강조



과거에도 오늘날과 같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있었을까? 우선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제○차 교육과정’이나 ‘○○학교 교육과정’처럼 국가 수준의 공식적 교육과정은 없었다. 하지만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에 관한 내용이 법령이나 규정·규칙들이 존재했고 과거 제도를 통해 국가적인 인재 선발의 표준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오늘날의 국가 수준 교육과정만큼 지대했다.

조선시대의 초·중등 및 고등교육을 관통하는 유학 교육과정은 형식상으로는 특정 교재들로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교재 중심 교육과정이며, 내용상으로는 문(文)·사(史)·철(哲)을 겸비한 인문·교양 중심 교육과정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유학 교육과정을 통해 추구한 목표는 인간다운 삶의 길을 찾고 실천하는 도학(道學)이자, 인간다움의 최고 경지를 실현하는 성학(聖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잡과 교육으로 칭하는 전문교육과 여성교육 또한 국가 주도했거나 적어도 국가가 안내한 형태로 활발하게 ‘교육과정’을 형성해왔다.

◆ "도(道)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 조선시대의 유학(儒學) 교육과정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규정은 ‘경국대전’을 비롯해 학령(學令)·사목(事目)·절목(節目) 등이다. 조선은 유교 사회로 실제 유학과 함께 무학(武學), 잡학(雜學) 분야의 인재 양성에도 국가적 관심을 가지고 해당 분야의 인재를 선발했으나, 조선시대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것은 유학이었고, 무학이나 잡학 교육에서도 유학을 기초 소양으로 학습하게 했다.

조선시대 국가 수준의 유학 교육과정에 관한 공식적 규정으로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성균관의 ‘학령’이다. 총 13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학령은 조선 초기부터 성균관은 물론 서울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 교육에도 기본 지침으로 활용됐다.

학령의 제3조 독서 조항에서는 “항상 ‘사서오경’과 여러 역사서를 읽고, 노장(老莊)에 관한 책이나 불경(佛經), 잡류, 제자백가의 책과 같은 것들은 끼고 다니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교육과정에서 유학을 정통으로 삼고 도교와 불교 등은 이단으로 배척하며 경(經, ‘사서오경’)과 사(史, 역사서)를 교육과정의 골간으로 삼는 것은 조선시대 유학 교육과정의 일관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학령’의 제5조 강경(講經․경서 강독) 조항에서는 유생들의 경사(經史) 학습과 관련해 대통·통·약통·조통·불통이라는 다섯 가지 평가척도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다섯 가지 평가 척도는 과거 시험의 강경 과목에도 적용됐다.<표 참조>




조선 중기에 가면, 선조 15년(1582)에 이이(1536~1584)가 임금의 명을 받아 이전의 ‘학령’을 보완하는 새로운 교육 관계 규정인 ‘학교모범(學校模範)’을 만들게 된다. 총 16개 조항으로 된 ‘학교모범’에는 이전의 ‘학령’보다 훨씬 진전된 형태로 표준적인 유학 교육과정에 대한 구상이 제시되어 있다.

‘학교모범’의 제1조 입지(立志)에서는 “배우는 자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 도(道)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 … 훼예(毁譽)와 영욕(榮辱),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이 일절 그 마음을 흔들지 못하게 하며, 분발하고 채찍질하여 반드시 성인(聖人)이 된 뒤에 그쳐야만 한다”고 해서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길을 찾고 꾸준히 실천해 나감으로써 인간다움의 최고 경지, 즉 성인에 도달하는 것이 유학 교육과정의 목표임을 천명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유학 교육과정 관련 자료로는 1732년(영조 8년)에 반포되어 전국적으로 시행이 독려된 조현명(1690~1752)의 ‘권학절목(勸學節目)’(총 14개 조항)이 중요하다. ‘권학절목’의 제8조에서 노·불을 이단으로 규정해 배제하는 것이나, 독서 내용을 교육과정으로 구성한 것은 조선 전기·중기 이래의 유학 교육과정의 흐름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절작통편’이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점이다. ‘절작통편’은 ‘주자대전’의 요점을 정리해 송시열(1607~1689)이 통편(通編)한 강학 교재이다. 이와 같은 자찬(自撰) 교재의 편찬과 활용은 조선 전기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전통이지만, 조선 후기에 가면 더욱 활발해진다. 

◆생도(生徒) 교육해 전문가 길러 = 유학 외에도 조선정부는 건국 초부터 전문 분야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유학을 특히 강조하면서 전문 분야의 교육이 상대적 낮게 평가되었을 뿐이다. 조선 태조는 즉위 교서에서 문무(文武) 두 과거(科擧)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서오경 등에 능한 유학자를 선발하는 것과 함께 무경칠서(武經七書)라 해 병법에 밝고 무예에 능한 인물을 선발할 것을 선언했다.

조선 태종 6년(1406년) 유학 및 다른 전문 교육 분야를 교육하기 위해 십학(十學)을 설치했고 각 학에는 책임자를 임명했다. 이때 설치된 십학은 유학(儒學), 무학(武學), 이학(吏學), 역학(譯學), 음양풍수학(陰陽風水學), 의학(醫學), 자학(字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악학(樂學)이었다. 십학은 일차적으로 관리로서 근무할 이들을 양성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에 중등 이상의 전문교육영역으로 담당 부서 및 교육기관을 두었다.

국가에서는 이들 전문 분야에 생도(生徒)를 배정하고 교육함으로써 각 분야 전문가를 길러 냈고 과거 시험을 통해 이들 중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관련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십학 중 예컨대, 현대의 한의학에 해당하는 의학 분야는 중앙의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그리고 지방의 향교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음양학은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 500여 년의 기간 동안 전문 분야 교육과정이 현저하게 변화하지는 않았고, 대체로 중국에서 개발된 교재를 사용하고 있는 한계를 보인다. 하지만, 모든 교재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역학의 중국어 교재인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 직해소학(直解小學)처럼 독자적으로 개발된 교재들이 활용되는 양상을 보였다. 

◆문자 익히며 세상 이치까지 배우는 아동교육 = 그렇다면 조선시대 아이들은 무엇을 공부했을까? 구체적 내용과 방법은 조선시대 유교이론서 가운데 핵심 중의 하나였던 ‘소학(小學)’에 잘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소학’은 ‘8~15세 정도의 아이가 입학해 다니는 학교’ 즉 성인이 대학(大學)에 들어가기 이전의 학교와 ‘그 학교에서 어린아이가 배우는 내용(책)’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쓰인다.

“마당에 먼지 나지 않게 물을 뿌리고 뜰을 깨끗하게 쓸어라. 사람이 부르면 바로 대답하고 집안에 들어가고 나올 때 인사를 공손히 하라. 부모님을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존대하고 벗과 친하게 지내라. 이 모두가 자신을 수양하며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는 기초이니라.(후략)” 이와 같은 소학의 내용은 조선 아동교육의 기본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다.

조선사회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할 능력이 되는 계층의 경우, 여섯 살이 되면 숫자와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르쳤다. 일곱 살이 되면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고리타분한 봉건적(?) 사유를 익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시기가 되면 어른에 대한 공경과 날짜 헤아리기를 가르친다. 열 살이 되면 가정을 벗어나 스승을 찾아 거처하면서 글을 배우고, 헤아리는 법을 배운다. 이후 음악과 시, 활쏘기․말부리기를 배우며 아동은 가정을 넘어 사회성을 기르고 공동체 교육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고등교육인 ‘대학(大學)’으로 향한다.

이런 아동교육에서 교육과정은 주희의 ‘소학’으로부터, ‘천자문(千字文)’. ‘훈몽자회(訓蒙字會)’, ‘신증류합(新增類合)’, ‘계몽편(啓蒙編)’, ‘동몽선습(童蒙先習)’, ‘격몽요결(擊蒙要訣)’, ‘사소절(士小節)’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문자 익히기 교재에서 자연의 이치와 법칙, 유교의 윤리와 학문, 수신과 예절 등 일상생활의 법칙과 삶의 원리를 깨우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여성상 보여주는 '삼강행실열녀도' =
“조선시대에는 여성교육이 없었다.” 근대 여성교육을 강조하는 문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이때 ‘교육’은 학교교육을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처럼 학교 교육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시대의 교육은 교화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교육을 지칭하는 개념은 교화였다. 교화는 학교에 국한되지 않고 가정과 향촌사회 전반에 걸쳐 추진되었으며, 여성교육 역시 교화 차원에서 진행됐다.

국가 차원에서 유교적 여성관을 보급하기 위한 노력은 중국 여훈서를 수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태종은 1404년(태종 4)에 명(明)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 610부를 수입했다. 이밖에 ‘여계’, ‘여사서’, ‘여훈’, ‘여칙’ 등이 수입됐으며 여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됐다. 또한 중국 여훈서의 수입에 그치지 않고 직접 여훈서를 간행하기도 했는데, 조선 여성을 상대로 편찬한 최초의 여훈서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1434)가 있으며, 왕실 여성이 직접 저술한 여훈서로 소혜왕후의 ‘내훈’(1475),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 이씨의 ‘여범’이 있다. 이중 가장 많이 간행된 책 ‘삼강행실열녀도’는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열녀전’과 ‘고금열녀전’을 본떠서 만들었지만, 강조하는 여성상이 조금 다르다.

‘열녀전’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상을 제시했으며 일부 여성들은 남성보다 지적·도덕적 우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삼강행실열녀도’에서의 열녀는 남편이 죽은 후 절개를 지키기 위해 개가를 하지 않으려고 신체를 훼손하거나, 죽음을 택하는 여성, 전쟁과 같은 변고를 당해 절개를 지키려고 저항하다가 살해되거나 스스로 자살하는 여성들이다. 즉, 조선이 국가차원에서 형성하고자 했던 여성상은 열녀였던 것이다.

국가 차원의 여성 교화 정책은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으나, 교화의 일차적 대상은 사대부 남성이었으며, 이들이 먼저 유교적 이념과 윤리를 수용한 후 16세기 이후 교화의 주도 세력으로 참여했다. 사대부들은 ‘소학’을 통해 여성관을 수립했고, 여훈서와 열녀전을 저술했다. 최초의 사대부 여훈서는 송시열(1607~1689)이 결혼을 앞둔 큰 딸을 위해 지은 ‘계녀서’이다. ‘계녀서’의 내용은 ‘부모 섬기는 도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혼인 이후 시집살이에서 요구되는 관계 윤리와 생활태도 등이다. 즉, 조선시대 여성 교육의 목적은 종법제적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열녀와 내조가 강조된 것이다.

김진숙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연구위원
박종배 동국대 교수
신창호 고려대 교수
김대식 조선대 교수
김언순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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