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부챗살처럼 펴졌습니다. 우렁이는 어기적어기적 논도랑을 기며 이슬에서 반짝 부서져 내리는 햇살가루를 쳐다보았습니다. "역시, 달빛보다는 눈부신 햇살이 더 좋아. 모든 것을 반짝이게 만들거든." 비좁은 논도랑가, 이곳에서 우렁이는 겨우내 참아내는 슬기를 배웠습니다. 이 슬기로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우렁이에게도 참아내는 슬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아기우렁이들은 바깥 세상이 그리운지 떼를 쓰곤 하였습니다. "엄마, 우리는 언제쯤 바깥 세상에 나갈 수 있어요?" "얼른 바깥 세상을 구경시켜 주셔요. 답답해 못 견디겠어요." 우렁이는 아기우렁이들의 투정에 못 이겨 풀섶으로 다가갑니다. 찌르르, 찌르르. 어둠 자락이 채 드리워지기 전 우렁이는 꿈결처럼 날아드는 풀벌레의 노랫소리에 문득 발을 멈추어 섰습니다. '세상엔 저렇게 아름다운 소리도 있구나. 그래, 바깥 세상은 행복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이야깃거리가 많을 거야.' 시인의 모습. 우렁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둠을 하얗게 밝히는 시인, 우렁이는 그런 시인의 모습으로 날이면 날마다 긴 긴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럴수록 우렁이의 가슴에는 유리알처럼 맑디맑은 희망이 움텄습니다. 우렁이는 시린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짙푸른 하늘이 한 송이의 파란 꽃이 되어 우렁이의 눈에 담겼습니다. '좁다란 세상, 여기서 살라고 내가 태어난 것은 아닐텐데…….' 우렁이의 가슴엔 날이면 날마다 이렇게 답답함이 머물렀습니다. 조붓한 논도랑을 떠나 너른 세상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늘엔 어느 새 연노란 별님이 돋아납니다. 별님들은 아름다운 금빛 옷자락을 흩으며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아, 별님." 우렁이는 별님의 긴 긴 금빛 옷자락을 붙들고 속삭였습니다. "별님, 별님께 제 소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별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실 테니까요. 저의 소원은, 소원은……." 우렁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목 메인 소리로 하늘만 올려다 볼 뿐입니다. '아냐, 용기를 내야 돼. 용기 있게 말해야 돼.' "저, 저는…너른 세상에서 사…사랑을 노래하고 해…행복을 노래하며 살고 싶어요." 그러나 이 속삭임은 별님에게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가는 목소리, 떨리는 목소리로는 전달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물안개처럼 밀려들었습니다. 온갖 기쁨도 희망도 멀어져 갔습니다. 아, 아! 우렁이는 알알이 와 닿는 아픔을 깨물며 하늘을 우러릅니다. 총총히 보석처럼 수놓은 별님들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정답습니다. "아, 그리운 별님!" 또르르, 눈가에서 수정처럼 맑은 눈물 방울 하나가 굴러 떨어졌습니다. "별님, 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아도 좋답니다. 오늘밤처럼 밤마다 별님을 뵐 수만 있다면 더 바라진 않겠어요. 그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한 걸요." 깊은 밤, 하얗게 밤을 밝히는 우렁이는 풀벌레의 여린 노랫소리로 뛰는 가슴을 잠재웠습니다. 수면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발목을 걷고 우르르 몰려 왔습니다. "야, 저거 내 꺼다!" 한 아이가 우렁이를 발견하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준이였습니다. 준이는 쏜살같이 첨벙첨벙 논도랑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뛰어 들었습니다. "잡았다! 되게 큰데." 준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함박꽃 웃음을 터뜨립니다. "야, 너네들 이렇게 큰 우렁이 봤냐? 되게 크지 응? 아마 이렇게 큰 우렁이는 못 봤을 거다, 히히." 준이는 으스대며 우렁이를 들어 보였습니다. 아이들 모두가 부러운 듯이 준이를 바라봅니다. "그거 학교 어항에다 기르면 좋겠다!" "정말!" "안 돼, 구워 먹을 거야." 아이들의 말에 준이는 얼른 호주머니 속에 우렁이를 감추었습니다. "그게 어디 네 꺼니? 다같이 잡은 건데." "웃기지 마. 어째서 다같이 잡은 거니? 내가 잡은 건데." "네가 잡았다고 네 것이 아냐. 우리가 다같이 왔으니까 그건 모두의 거야." "뭐라구? 영수 너 주먹 맛 좀 볼래?" 제법 똑똑한 소리를 잘하는 영수에게 준이는 씩씩거리며 대들었습니다. 마침내 입씨름을 넘어 몸싸움이 벌어질 참입니다. "너희들 게서 뭐 하는 거냐, 응?" 때마침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시던 선생님께서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 요즈음 시절에 아주 귀한 것을 잡았구나. 준이 네가 잡았니?" "예!" 준이는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참 잘했구나. 그렇잖아도 자연 시간에 쓸 우렁이를 구하려던 참이었는데. 이걸 교실 어항에 넣어 기르면 참 좋겠다!" 선생님의 말씀에 준이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우렁이를 건넸습니다. 선생님의 책가방 속에 넣어진 우렁이. 우렁이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으로 또다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어휴, 답답해. 엄마 숨이 막혀 죽겠어요." "엄마, 목이 타요. 물 좀 주세요." 그날 밤, 아기 우렁이들은 몹시도 보채댔습니다. "아가들아, 조금만 참으렴. 우리에겐 넓고도 아름다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단다." 엄마의 눈빛이 촉촉히 젖어 들었습니다. 그 촉촉한 눈빛 속에 꿋꿋한 의지가 머물렀습니다. 그 의지가 하나로 모아져 자신도 모르게 믿음이 돼버렸습니다. 넓은 세상과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렁이는 밀려드는 외로움을 견디며 어둠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금새 유리 조각처럼 조각조각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한 점의 햇살도 내리지 않고 별님의 옷자락조차 볼 수 없는 교실의 뒷켠, 조그만 어항 속에 넣어졌기 때문입니다. '아, 세상의 모든 것을 만나고 싶었는데……'. 눈물이 흐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눈물만은 꾹꾹 참았습니다. 아기우렁이들에게 엄마의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렁이는 모든 것을 주기로 했습니다. 살을 주고 뼈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 것만이 조금이라도 아기우렁이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뼈와 살을 준 우렁이의 몸뚱이는 자꾸만 야위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만지면 툭 하고 으스러져 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입니다. "애들아. 이 아기우렁이 좀 봐. 간밤에 낳았나 봐!" 어항 속을 들여다보던 한 아이의 외침 소리에 아이들이 어항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어디, 어디?" "어머, 신기해라. 꼭 엄마를 빼닮았어!" "세상에―. 생명은 역시 신비한 거야." 아이들은 저마다 신비에 찬 눈빛으로 어항 속을 바라보았습니다. 시간의 사슬은 어항 속에서도 풀어졌습니다. 어느덧 여름방학식 날이 가까웠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애들아, 저 우렁이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저의 집 어항에 기르다 갖고 올게요." "선생님, 어항보단 수족관이 날 거예요. 저의 집에 작긴 하지만 수족관이 있거든요."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가지고 가겠다고 수선을 떨었습니다. 선생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아예 학교 연못에 넣어 기르면. 그렇게 되면 집으로 가져다 기르는 수고도 덜게 되고 우리 학교 어린이 모두가 볼 수 있어 좋을 테고." "그게 좋겠어요, 선생님." "저두요." "저두요." 뜻밖에도 아이들 모두가 선생님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렁이를 연못에 넣자 하늘하늘 춤추듯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어둠이 드리운 밤하늘, 우렁이는 아슴푸레 내리는 별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별님의 옷자락입니다. 우렁이는 또박또박 가슴속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별님, 저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졌어요." ―정말 잘했다. 그렇지만 너는 더 큰 꿈도 이룰 수 있을 거야. 네가 가진 믿음, 그런 믿음만 저버리지 않는다면. "네―?" 아련한 별님의 속삭임은 우렁이의 귀에 잔잔한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밀려왔습니다. 우렁이는 그 날 이후 더 큰 믿음 하나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연못보다 넒은 세상, 사랑을 맘껏 노래하고 행복을 꿈 꿀 수 있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렁이의 몸은 볼 수 없을 만큼 허물어져 갔습니다. 껍질이 삭아 군데군데 구멍이 뚫렸고 눈은 침침해 졌습니다. 귀는 잘 들리지 않았고 움직일 힘마저 잃어 갔습니다. 이렇게 된 우렁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물위로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좁아졌습니다. 좁아진 하늘에서 장대비가 후두둑후두둑 쏟아졌습니다. 순식간에 도랑물이 넘쳐나더니 연못물이 넘쳐납니다. 물위에 둥둥 뜬 우렁이는 결국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말았습니다. 등잔불이 가물가물 빛을 잃어 가듯 우렁이는 아득해져 가는 정신 과 함께 어디론가 멀리멀리 떠밀려 갑니다. 그렇게 한없이 떠밀려 가기를 얼마였을까? 우렁이는 보았습니다. 언뜻언뜻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물보라를 보았고 하얀 갈매기의 날개깃을 보았습니다. "아, 별님!" 우렁이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고 별님을 우러릅니다. 아니, 별빛 배에 꿈을 싣고 꿈의 날개깃을 파닥입니다. 그러자 언젠가 들었던 별님의 속삭임이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너는 더 큰 꿈도 이룰 수 있을 거야. 네가 가진 믿음, 그런 믿음만 저버리지 않는다면. 우렁이는 시린 가슴을 움켜쥐며 믿음 하나를 더욱더 세게 부둥켜안았습니다. 마침내 우렁이가 닿은 곳은 어느 조용한 바닷가였습니다.
별빛 부서지는 바다는 우리들의 꿈 터이지요. 달빛 부서지는 바다는 우리들의 샘터이지요. ………………………… 바닷가에는 어디선가 떠밀려 온 빈 조가비와 소라껍데기들의 노랫소리가 잔잔한 시가 되어 흩뿌려지고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우렁이의 영혼에도 잔잔하게 밀려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