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무협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문파와 국가의 안녕, 명예, 인간의 도리, 혹은 복수 같은 커다란 대의명분을 위해 싸웠다. 그런데 '무사'의 주인공들은? 그들은 오직 집으로, 고려로 돌아가기 위해 싸운다. 중원을 가로질러 터무니없는 사투를 벌이는 동안 조국의 평화나 사신단의 임무 같은 것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오로지 고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들에겐 고려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정말 있었던 것일까.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찾아 떠나 보자. "길을 떠나온 자에게만 집으로 가는 그 아득한 길이 보일 것"이라고 영화 '무사'가 친절히 가르쳐 준 데로….
1. 고려와 원, 그리고 명 1351년 오랜 볼모생활 끝에 귀국한 공민왕은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길 열망합니다. 그는 승려 신돈이나 성리학자들을 기용, 친원세력을 제거해 나가지요. 1369년엔 명과 국교를 체결, 원을 견제하지만 두 나라의 관계는 1372년 제주도로 말을 징발하러 간 명 사신이 몽골 출신 목동들에게 피살되면서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1374년, 고려에서 귀국하던 명의 사신들이 원 출신 김 의에게 살해되면서 벌어집니다. 이 행위를 실세였던 친원파 이인임이 사주했다고 의심한 명은 1375년 최원, 손천용, 전보, 김보생 등 잇달아 파견된 고려의 사신단 일행을 구금했습니다. 1378년 이들 대부분은 고려로 돌아왔지만, 손천용 사신단은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영화 '무사'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입니다.
2. 최정과 용호군 고려의 수도 개성을 지키던 중앙군은 2군6위. 그중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으로 이들의 임무는 국왕과 왕궁경호였으며 그 숫자는 3000명 정도. 무과시험이 없었던 고려에서 장군 등 지휘부는 전통적인 무장집안에서 세습되거나 특별한 전공을 세웠던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1170년 무신쿠데타로 무인정권이 들어서고, 몽골-왜구-여진-홍건적 등의 잇따른 침략에 무장들은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약관 18세에 장군이 된 최정(주진모)의 하늘을 찌를 듯한 오만과 독단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런 그가 사신단의 정, 부사 모두를 비명횡사케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호위자인 자신이 죽음으로 책임져야할 줄 뻔히 알면서 죽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고려로 돌아간다? 실제로 최원 등은 고려로 돌아간 후 명의 첩자로 몰려 죽음을 당했는데... 그는 왜 그토록 고려로 돌아가려고 했을까요.
3. 진립과 주진군 고려 지방군은 중부이남의 주현군과 북쪽국경의 주진군. 북쪽국경인 양계-북계(평안도)와 동계(함경도)를 지키던 주진군은 잇따른 국경전으로 전쟁경험이 풍부했습니다. 진립(안성기)은 그런 북계지역의 대정(하사관급)을 오래 지낸 인물입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국경전투를 치른 그로선 경험도 없이 거들먹거리는 젊은 장군이나 중앙군이 눈에 가시였을 겁니다. 더구나 돌아가면 처형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하사관인 그가 상관을 죽이거나 중국 내로 도망치지 않고 그들을 도와 굳이 고려로 돌아올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4. 여솔과 노비 여솔(정우성)은 노비입니다. 그것도 솔거노비(주인집에 매인 노비)지요. 아무리 창술에 달통하고 주인에게 인간적 대접을 받았다지만 영화 속 여솔의 캐릭터는 노비로 보기엔 무리가 많습니다. 끊임없이 자유인을 열망했던 그가 고려로 돌아가야 할 이유, 어느 누구보다도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그는 왜 그 길을 가는 걸까요? 주인이 가니까 나도 간다는 '노비근성'?
5. 부용과 홍무제 명황제 홍무제는 냉혹한 공포정치를 폈습니다. 독재권력강화를 위해 개국공신을 포함 5만명이나 처형을 하고 금의위라는 비밀정보조직을 동원, 전 중국을 공포에 떨게 했지요. 그는 26명의 아들과 15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아들에게 지방제후를 맡겼지만 자식조차 믿지 못해 감시인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홍무제의 초상화를 보면 세상에 그런 험상궂은 얼굴도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만큼, 얽은 얼굴에 튀어나온 이마, 주걱턱에 쭉 찢어진 눈을 가지고 있답니다. 황후 역시 미모는 아니구요. 그렇다면 부용(장쯔이)공주는?!? 환상 속의 그대.
6. 사막 중원의 사막과 초원. 고려의 무사들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인간의 숨결보다는 자연의 거대함이 그대로 배어 나와 묻혀버릴 것만 같은 그런 초월적 공간 탓일까요. 영화는 구체적이고 사실에 근거한 역사를 배경으로 했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무사'가 바라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어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대한 노스탤지어인 것 같습니다. /서혜정 hjkara@kft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