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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은상> 빛그리미

어느덧 내 그림의 색채는 노란색과 빨강이 주가 됐다. 평택에 자리 잡고 시작한 그림이 어언 20년이 넘었다. 드넓은 평야와 서해바다의 노을을 닮아온 까닭인가 보다. 그동안 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다수의 공모전에 출품도 하면서 동호회활동으로 해마다 꾸준히 전시회에 참여해 왔다. 그동안 내게 그림은 혼자만의 작업이었다. 그림이라는 것이 내게 ‘함께’라는 어울림의 개념이 된 것은 불과 6년 전부터였다.

서해 바다와 맞닿은 곳, 유치원생을 포함해 전교생 70여명의 작은 홍원초. 2005년 3월2일 교사로서 마지막 학교인 홍원초로 첫 출근을 했다. 차를 타고 40여분이나 가야 하는 외떨어진 학교였다. 눈이 내리는 첫 출근길에서 교문을 못 찾아 학교 뒷마을까지 갔다가 마을 어른께 길을 물어 간신히 찾아갈 수 있었다. 5년 전 분교 격하의 위기는 간신히 넘겼지만 여전히 학생 수는 점점 줄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근무하는 4년 동안 그림을 통한 ‘행복한 교육공동체 학교’를 경험했다. 개인만을 위한 그림 작업이 아닌 열정과 사랑을 학생, 학부모, 교직원이 함께 나누는 행복한 그림 작업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활동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 때 구성된 홍원초의 수채화 동아리 이름이 ‘빛그리미’였다. 여기서 ‘빛’은 항상 빛나는 학생들을 뜻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며 나눔을 공유하는 교사, 학부모, 지역민들을 ‘그리미’라 칭하며 만든 이름이 ‘빛그리미’이다. 개인적으로 즐겼던 취미, 특기 생활이 학생과, 교사, 지역민과 함께 공유하며 학교교육활동에 새로운 활력소가 됐던 경험을 이야기 해보려한다.


봄, 연둣빛 새순의 아카시아 나뭇가지
자르고 다듬어 낚싯대를 만들었다. 우람한 체격의 교감선생님이 양지바른 수돗가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낚싯대를 만들고, 나는 낚싯대마다 낚싯줄을 매달았다. 낚싯대는 모두 여섯 개, 일학년 다섯 명과 담임교사인 내 것이다.

우리 반은 낚싯대를 들고 근처 바닷가 갯벌로 체험학습을 갔다. 내 차에 다섯 아이들을 태우고 갯벌에 가서 조개도 캐고, 바다낚시도 했다. 처음 해보는 낚시라서 물고기는 제대로 잡지 못했지만 홍원의 새내기 일학년 아이들은 교실을 벗어나 바닷바람과 함께 하며 친구, 선생님과 자신의 관계를 배우고 익히는 그야말로 삶의 체험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날 체험이 ‘빛그리미’ 작품전의 해맑은 아이들 표정으로 화폭에 담겼다. 따사로운 새봄의 수채화였다.

봄나들이, 서울역 푸드코너의 빨간 전광판
아이들이 주문한 음식 주문번호가 떴다. 창덕궁 가는 길에 서울역 푸드코너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2학년 아이들은 4, 5학년 언니, 오빠들과 한 모둠이 됐다. 버스, 기차, 지하철을 타고 갔다. 아이들끼리는 기차를 타 본 경험도, 하물며 지하철을 탄 경험이 없어 하나부터 열까지 이 모든 일이 새로움이었다. 음식 값이며 교통비는 아이들에게 미리 나누어 주고 알아서 사용하도록 했다. 서울역 2층 푸드코너의 빨간 전광판을 본 가슴 설레는 경험은 개나리가 활짝 핀 봄날의 일이었다. 그날 체험이 ‘빛그리미’ 작품전의 순수한 아이들 모습으로 화폭에 담겼다. 깊어진 봄날의 수채화였다.



초여름, 서해바다 위 파란 꿈
전교생이 해군2함대 초계함인 순천함을 타고 풍도까지 다녀왔다. 초계함을 타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2007년부터 교류를 맺어온 순천함 해군들의 초청 덕분이었다. 다시 직접 학교를 방문한 해군들은 아이들과 축구도 함께 하고 호떡도 구워주었다. 달콤한 호떡 맛에 빠져 홍원 가족들은 뜨거운 줄도 몰랐다. 함선을 직접 타보는 날, 함장님을 비롯한 해군들이 가족처럼 친절한 모습으로 화폭에 담겼다. ‘빛그리미’의 활동에 무지개 색 희망을 주었다.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여름날의 수채화였다

늦은 여름, 회색빛 주차장 벽에
꽃이 피었다. 개나리, 영산홍, 모란, 해바라기, 도라지꽃, 나리꽃…. 홍원의 화단에 계절 따라 피고 지던 이 꽃들이 주차장 벽에도 피었다. 하얗게 쏟아지는 햇살 가득한 여름방학 마지막 날, ‘빛그리미’들이 모여서 회색 주차장 벽에 꽃을 그렸다. 꽃밭을 만들었다.

아이들과 교사들의 그림동아리 활동에 관심을 보이던 서진, 유진, 준엽이 어머니는 누구보다 정성껏 그렸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어도 학창시절에는 이루지 못했던 배움이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했다. 색색의 페인트 통을 주차장에 나란히 줄 세우고, 누구나 눈길도 주지 않던 회색빛 주차장 벽에 오색의 꽃밭을 옮겨 놓은 것이다. 늦은 여름, 해바라기를 화폭에 담던 ‘빛그리미’ 여름날의 추억이었다.

가을, 노오란 은행잎이 떨어질 때
운동장을 둘러싼 스물다섯 그루의 은행나무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빛그리미’ 모두 한 번쯤은 화폭에 담아 본 풍경이었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치우는 날 빗자루, 쓰레받기, 갈퀴, 리어카를 동원한 ‘빛그리미’들의 가을 야외 모임이 있었다. ‘빛그리미’들의 소중한 동반자, 은행잎을 치우면서 곧 찾아올 하얀 겨울맞이를 하는 것이다. 이 날은 ‘빛그리미’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는 잔치 날이기도 하다. 준엽이 아버지가 봄부터 사다 키운 꺼먹 돼지, 그 돼지를 잡아 여는 잔치풍경은 ‘빛그리미’들의 가을 날 수채화 화폭에 소중히 담겼다.



겨울, 빈 가지 사이 파란 하늘이 그리운 날
짚더미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교장선생님은 이엉을 만들었다. 대여섯 단 볏짚은 이미 학교운영위원장님이 가져다 놓은 것. 그것으로 김장 광 지붕에 얹을 이엉을 만들었다. 학교 텃밭에서 키운 싱싱한 무, 배추로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아서 묻어둘 요량이었다. 학교 주변에 식당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 겨울방학동안 근무하는 선생님과 공부방 아이들의 점심상에 올릴 겨울 반찬이었다.

꼬박 이틀 동안 ‘빛그리미’들이 함께 모여 준비한 빨간 속 양념으로 버무려진 김치, 그것을 땅에 묻어두고 겨우내 먹었다. 어느 때는 김치 그대로, 더러는 김치찌개로, 어느 날은 삼겹살 쌈으로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겨우내 ‘빛그리미’들의 행복한 점심상에 올랐다. 빨갛게 물든 석양을 보며 빈 가지 사이 파란 하늘이 그리운 초겨울의 수채화였다.


‘빛그리미’의 사계절은 다양한 만큼 추억도 많았다. 그것은 그림을 통한 화합이고 함께 하는 즐거움이었다. 그 행복한 결실은 언제나 우리의 작품 전시회로 빛났다. 지난해 11월 4회를 맞는 홍원초 수채화연구회 ‘빛그리미’전이 평택시내 베아트리체 갤러리에서 열렸다.

이제는 성남, 수원, 화성, 심지어 경북 구미까지 흩어져 근무하고 있는 전 홍원초의 교원들과, 현재 홍원의 교원, 학부모 ‘그리미’들이 모여 벌써 네 번째 이야기를 엮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매년 이맘때면 오로지 그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홍원 ‘빛’들의 교육을 위해 온 정성을 함께 쏟았던 일들을 떠올리곤 한다. 공감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 홍원의 ‘빛’들이 보다 큰 꿈을 꾸게 하기 위해 각자의 능력을 나누며 보낸 물빛처럼 아련한 행복 나눔의 시간들이었다. 교사의 특기가 자신의 것만이 아닌, 함께 공유하며 서로 이끌어 다함께 즐기는 것이 될 때 학교는 행복으로 가득 찬다.

홍원초를 떠난지 벌써 3년이 되었지만 계절마다 한 폭의 수채화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홍원초 수채화연구회 ‘빛그리미’의 자랑스러움과 행복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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