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말 고사를 앞 둔 교실 분위기는 늘 긴장감에 휩싸인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시험 범위까지 진도를 맞추기 위하여 온 전력을 다해 수업에 임했다. 그 한 시간이 나에게는 십 분과도 같았고 아이들에게는 열 시간처럼 느껴졌으리라 생각된다.
기말고사 일주일을 앞둔 지금. 아이들은 마치 전쟁을 앞 둔 병사들처럼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느냐고 촌각(寸刻)을 다투며 책과 씨름 하고 있다. 모든 과목들이 시험범위까지 진도를 다 나간 상태이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진도를 더 나간다고 하는 것이 교사나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했다. 어떤 때는 교사인 나의 이기심 발상으로 자습(시험공부)을 시킬까 고민을 해 보기도 하나 그건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사실 요즘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의미 없는 날들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 무료함을 누군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학생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기에 내 자신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있는 상태다. 다리를 다쳐 한 달 이상 동안 깁스를 한 상태로 수업을 하고 있다.
혹시라도 머리를 짜내어 생각해 낸 하나의 생각에 온갖 살을 덧붙인다면 내 얘기로 승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얘기의 진실성과 사실성이 나로 인해 왜곡되어질까봐 차마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난 뒤의 5교시 수업은 식곤증 때문에 학생, 교사 모두가 힘든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교사는 이 시간을 '마의 5교시'라고 하여 나름대로의 테크닉을 발휘한다고 한다. 마치 틀에 박힌 것처럼 수업 시작 전 실장으로부터 인사를 받고 난 뒤, 출석 점검을 하고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하고 배울 내용을 전개해 나간다.
그런데 이 '마의5교시'에 기어이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이들로부터 인사를 받고 난 뒤, 책을 펴는 순간 한 아이가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피를 토하는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옆 짝이 등을 두드리며 "괜찮니?"를 연발하였다.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거센 호흡을 하며 '콜록 콜록'하였다. 모든 아이들이 모두 놀라 그 아이에게 몰려들었다. 그 와중에 어떤 아이는 훌쩍거리며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사태가 심각한 것 같았다. 그 어떤 조치를 내려야 될지 몰라 한참을 그 광경만 지켜보면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였다.
"괜찮니? 왜 그래? 무슨 일이니?"
그 순간에 그 아이가 기침을 하면서 입에서 나온 피묻은 화장지가 통로에 떨어지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아이가 더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떨어진 하얀 화장지가 흰색이 없을 정도로 붉은 색만 내 눈에 띄었다. 이제 조치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꺼내들고 전화를 걸려고 하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의 반응이 너무나 침착하고 당황하는 빛이 보이지 않자 학생 중의 하나가 불쑥 내뱉은 말이 있었다.
"야, 이제 그만 하자. 선생님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잖아."
처음에는 그 아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친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금 전까지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입에서 피를 토하던 아이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입을 막았던 휴지를 빼면서 피식 웃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모든 아이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낄낄거리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잠시동안 방금 전까지 일어난 모든 일에 어안이 벙벙해 멍하니 서서 아이들의 얼굴만 한참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아이들이 만들어 낸 '깜짝쇼'라는 것을 알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들의 이런 행동에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연출한 그 '깜짝쇼'에 내 자신이 적극적으로, 아니 리얼하게 연기를 해내지 못한 것 때문인지 모른다. 어쩌면 아이들은 내가 놀라는 표정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랬다. 사건 당시에는 내심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떤 조치를 내리기 전에 또 다른 생각이 먼저 떠올려 졌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않고 공부만 하더니 결국 큰 병에 걸리게 되었구나. 이제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꼭 이렇게 까지 공부를 시켜야 하나'
더욱이 그 아이에게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얼굴이 너무나 창백하여 늘 누군가로부터 "어디 아픈 데가 없니?"라는 질문을 받아오던 아이였다.
또한 입학할 때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모든 선생님들로부터 주목을 받고있는 아이였다. 설마 이 아이가 이런 장난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공부를 잘하기에 이와 같은 장난기를 발동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학생들에게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이 순간에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의 5교시'인 이 무료한 시간을 내 대신에 아이들이 해 주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