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워낙 많은 비리와 촌지 문제가 불거져 스승의 날 행사를 취소한 학교가 많다고 한다. 우리 학교에서도 '촌지 안 받기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조·종례를 통해 학생들에게도 교육을 시키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고 만에 하나라도 이것을 어길 때에는 엄중히 문책을 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13일 종례시간이었다. 우리 교실의 학생들에게도 돈 걷는 행위와 선물을 준비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올해는 스승의 날 행사가 없으니 부모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리라고 했다. 갑자기 내려진 지시에 아이들은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는 아이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할 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14일 토요일 아침. 출근을 하니 교무실의 분위기는 썰렁하기까지 했다. 예전에 많은 꽃들과 선물로 가득 메웠던 선생님들 책상 위에는 아이들이 쓴 몇 통의 편지만 놓여있었다.
쉬는 시간, 몇 명의 아이들만 짝을 지어 카네이션 한 송이씩 들고 교무실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어떤 선생님은 책상 앞에 앉아 계속 한숨만 내쉬었고 늘 스승의 날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온 선생님은 내심 반기는 듯했다. 그리고 가끔 옛 제자들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좋아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제간의 돈독한 정을 엿볼 수도 있었다. 우리 모두가 즐거워야 할 스승의 날에 선생님들의 마음은 희비가 엇갈렸다.
그런데 1교시가 끝나자 갑자기 우리 반 실장이 편지 봉투 한 묶음을 들고 교무실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편지 봉투를 건네주면서 "죄송합니다" 한마디를 하고는 쏜살같이 교무실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 말속에는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죄송함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하니 왠지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편지 봉투 묶음이 두툼한 것으로 보아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쓴 편지인 듯했다. 편지를 하나 하나 읽어가면서 그 동안 몰랐던 많은 사실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 내용들도 있었다.
중요한 건 아이들 개개인의 편지 내용이 스승의 날이라고 해서 쓴 형식적인 편지가 아니라 평소 나에게 하고픈 이야기 모두를 정성들여 쓴 편지라는 사실이었다. 정말이지 아이들은 나를 울리고 웃기는 광대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것을 깨우쳐 주는 스승과 같은 존재일 때도 있다. 아이들이 오늘 나에게 쓴 편지들은 그 어떤 선물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종례시간. 아이들의 편지를 다 읽고 난 뒤 민망하여 조용히 교실 뒷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한 아이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 내 팔을 잡고 교실 앞문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교실 문을 열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스승의 은혜' 노래를 실장의 선창에 따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노래를 불러주는 내내 아이들의 맑은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나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아이들은 광고송을 개사해 부르기 시작하였다.
"선생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선생님, 힘내세요."
그리고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답례로 내가 아이들에게 해준 마지막 말이 있었다.
"얘들아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스승의 날 행사가 거행된 지 24년이라는 세월이 흘렸다. 처음으로 스승의 날 행사가 치러지지 않은 오늘. 처음에는 이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홀가분한 하루였다. 금수강산이 스물네 번 바뀌어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아이들의 '환한 미소와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