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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리포트(미분류)

선생님 웃어주세요!

고3 학생들에게 있어 주말이란 사실상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1, 2학년 학생들은 주말을 이용하여 주중에 쌓인 피로를 풀거나 취미 활동을 하는 등 재충전의 기회로 삼지만, 고3 학생들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입시를 목전에 두고 촌음(寸陰)을 아껴써야 할 입장에서 주말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전날 비가 내렸던 탓인지 창밖으로 보이는 수목의 싱그런 자태와 청명한 기운에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야외로 나가기엔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그러나 오늘 오후는 운좋게도(?) 자율학습 감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야외 나들이는 애시당초 글른 일이다. 이럴 때면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든다. 주말에도 학교에서 살다시피하는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른지. 아이들이 아빠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니 말이다.

토요일이라 출석부 정리를 하던 중, 반장을 맡고 있는 정호가 찾아왔다. 뭔가 부탁이 있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YMCA에서 주최하는 노래자랑에 나가고 싶으니 오후 자율학습을 빼달라는 것이다. 정호는 우리반에서 팔방미인으로 통한다. 공부도 잘하지만 운동이나 예능은 거의 프로(?) 수준에 가까울 만큼 탁월한 실력을 자랑한다. 지난번 학교 축제 때는 메인 MC로 활약했고 가요제에도 출전하여 금상을 받은 바 있다.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한가하게 노래자랑에 나가겠다니 내심 궤씸한 생각이 들었다. 특히 며칠전에는 1학기 수시모집에 응시하겠다는 뜻도 밝혔는데 노래자랑이라니. 선뜻 답변은 못하고 녀석이 보는 앞에서 탄식만 뽑아냈다. 안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참기로 했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녀석같으면 퉁명스런 담임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자율학습에 들어갔다. 교실을 순회하며 출석 체크를 하던 중 우리반에 비어있는 자리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정호의 자리였다. 기어코 노래자랑에 나간 것이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녀석이 돌아오면 잘못을 엄중히 따져 그에 합당한 벌을 주리라 단단히 마음먹었다.

오후 자율학습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모두 귀가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내가 할 일만 남아있다. 매주 토요일마다 교재를 걷어 아이들의 학습 내용을 일일이 점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저녁식사부터 해결한 후, 다시 교무실로 돌아오기로 했다.

주말 저녁 시간까지 학교에 나가는 남편과 아빠를 서운하게 바라보는 아내와 아이들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교무실이 있는 3층에 거의 다다를 무렵, 우리반 교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궁금한 마음에 교실쪽으로 다가가보니 정호 혼자서 공부하고 있었다. 아마도 노래자랑에 나가느라 빼앗긴 시간을 보충하려는 듯 싶었다. 다시 교무실로 돌아와보니 책상위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께,
마음이 답답해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시험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노래자랑에 나간다고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 맞는 것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아직 어른이 아니다보니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 학업에 지장 없도록 여가 시간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겠습니다.
선생님께 자꾸 부담(?)드리는 것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요즘 우리반 아이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몇 아이들이 떠들긴 하지만 그것도 잠깐입니다.
공부할 때는 모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반 야자시간은 걱정하지 마세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수시로 갈 생각입니다.
1차든 2차든 정시보다는 유리하다고 봅니다.
선생님께서도 알고 계셨으면 하는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선생님께서 수업시간 말고는 조례와 종례 시간에 잘 웃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너무 냉철하셔서 약간 부담되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침 시간에 '열심히 해라', '어려워도 힘내라', '조금만 참자'는 등 친숙한 말씀으로 저희들을 다독여주면 그나마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끔 농담도 던지고 말입니다.
너무 주제넘는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남은 150여일,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제자 정호 올림-」

아마도 아침에 있었던 일과 결부하여 그동안 담아두었던 생각을 글로 표현한 듯 싶었다. 쪽지를 읽어가면서 며칠전 자세가 점점 흐트러지는 몇 몇 아이들에게 꾸지람을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대학입시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하루하루 힘겨워하고 있는데, 격려의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주지 못했던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다.

이튿날 자율학습이 시작되자마자 정호를 불렀다. 먼저 노래자랑에서 좋은 결과가 있었는지부터 물었다. 다행히 입상권에 들었다고 한다. 가볍게 칭찬의 말을 건네고 쪽지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반장으로서 좋은 의견을 제시했으나 혼자서 서른 다섯명을 대하는 담임의 역할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설명했다. 물론 정호도 그 동안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정호와의 대화를 통하여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또 무엇을 원하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정호를 돌려보내고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여름의 무성한 녹음 사이로 피곤에 지친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내일 아침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교실로 들어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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