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을 하다보면 1년에 평균 2, 3명 정도 전학을 가게 된다. 5명까지 전학을 간 경우도 있었다. 가정의 여러 가지 이유로 전학을 가게 되는 어린이들의 얼굴은 그동안 정들었던 학교와 같은 반 친구들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리포터는 초등학교 때 전학을 많이 다녔다. 그래서 떠날 때의 아쉬움과 새롭게 적응하는데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교사가 된 직후부터 줄곧 전학 가는 어린이들에 대한 송별회와 새로 오는 친구들에 대한 환영회를 꼭 마련해주고 있다. 전학을 간 어린이들은 한동안 우리 반 홈페이지 게시판을 떠나지 않고 그 곳 학교의 소식을 알려주면서 친구들의 근황을 묻곤 한다. 또 전학을 온 친구는 빨리 적응한 나머지 학급임원이 되기도 한다.
오늘 우리 반에서 준희의 송별회가 있었다. 아주 특별한 송별회이다. 왜냐하면 준희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같은 반에서 생활한 친구들과 헤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3년 아니 병설 유치원부터라면 4년을 함께 지냈으니 얼마나 정이 많이 들었을까?
송별회가 시작되었다. 어제 퇴근하면서 책상을 둥글게 배치해 놓았는데 그 안으로 준희가 들어왔다. 준희 옆에는 ‘준희야, 잘가!’라는 푯말이 놓여졌다. 송별회로 인하여 들떴던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 때 정연택 선생님께서 작사, 작곡하신 ‘그리운 내 동무’ 노래를 틀어주었다. 전주가 흘러나오자 아이들은 노래 부를 준비를 하였다..
꽃구름 흘러흘러
언덕을 넘어서 가고
아지랑이 아롱아롱
하늘높이 피어난다
무지개 빛 고운 꿈을
멀리띄워 보내고
천사들의 이야기를
소곤소곤 속삭여 주던
그리운 내 동무여
지금은 어디메뇨
보고픈 내 동무여
지금은 어디메뇨
노래는 두 번 반복되는데 간주가 시작될 때 준희가 눈물을 닦고 있었다. 두 번째 노래가 시작되자 아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눈물만 닦는다.
친구들이 하나, 둘 나와서 준희에게 선물을 준다. 오랜 시간 정들었던 때문인지 모두들 정성껏 선물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요한이의 선물이었다. 얼마 전 모범조와 함께 서울국제문구전시회를 갔을 때 샀던 50센티미터 긴 연필을 준희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그것은 요한이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서 가장 아끼던 물건이었을 것이다.
선물을 한 아름 안은 준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리포터는 준희가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생크림이 듬뿍 발린 케이크를 준비하였다. 준희는 무척 기뻐하며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준희와 있었던 일중에 기억에 남는 일 하나를 골라 역할극을 하려고 하였으나 시간이 부족하여 편지지에 써서 전달하였다. 이제껏 화해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매듭을 풀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서로 사과하도록 권면하였다. 앞으로 언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으니 두고두고 후회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정의감에 불타서 의욕적으로 맡은 일을 성실하게 잘 하던 준희, 이제 월요일이면 준희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 체육시간이나 모둠활동을 할 때 인원이 적어서 항상 아쉬움이 많았는데 준희가 전학을 가니 서운한 마음을 비할 데 없다.
준희가 가는 곳은 한 학년에 6학급이라고 한다. 우리 학교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학교이다. 아무쪼록 갑자기 바뀐 환경에 잘 적응하여 남은 3학년을 잘 보내고 앞으로 훌륭한 인물로 자라주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