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OO초등학교 교사 OOO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한 가지 여쭐게요. 혹시 김천에 있었던 교사 OOO를 아시나요?” “어머나! 조 선생님이세요?, 저 OOO맞아요.”
며칠 전 방학 중 당직을 하기 위하여 나온 어느 날 걸려온 전화였다.
1980년 초임 발령을 받아 간 학교는 12학급 규모의 전형적인 농촌 학교로 교통편이 매우 좋지 않아 출퇴근이 용이하지 않았고 학교 앞 사택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듬해 발령을 받아 온 교사는 유치원 선생님을 포함하여 새로 초임발령을 받아온 여교사가 3명이어서 2명씩 나누어 사택 방 두 칸에서 생활을 하였다.
일주일씩 식사당번을 나누어 하고 저녁식사 후면 한 방에 모여서 게임을 하거나 노래도 부르고 앞길이 창창한 여교사로서의 꿈을 마음껏 키우면서 밤새워 얘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자전거를 버스 정류장에 세워놓고 버스를 타고 화려한 외출을 하며 생필품이나 먹을 음식재료들을 사오곤 하였다.
당시 매우 엄하신 교장선생님 아래서 업무 하나 하나 뿐만 아니라 사택관리에 이르기까지 호된 훈련을 받았었다. 서툰 솜씨로 사택 도배도 하고 연탄가스를 먹어 두통을 호소하면서도 교장선생님이 무서워 말씀도 드리지 못하였던 초임시절, 눈물을 많이 흘렸던 만큼 우리 여교사 네 명은 더욱 정이 두터워 갔고 서로를 위로하며 학교와 사택이 가깝기에 퇴근시간과 주말 휴일이 따로 없이 아이들 교육에 온갖 열정을 다 쏟았다.
다음 해 나는 경북에서 충남으로 내신을 했고 결혼과 함께 경기도로 이동하게 되어 25년째 통 소식을 모른 채 지내고 있었는데 오늘 그 중 한 교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한국교육신문 2006년 1월 16일자에 리포터가 쓴 ‘맨발의 크리스마스카드’ 란 글을 보게 되었는데 글 내용으로 보아 분명히 리포터로 생각되어 전화를 걸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마침 당직이어서 직접 전화를 받았으니 이런 기쁨이 또 있을까? 알고 보니 학교도 구리시 가까이 남양주에 있는 풍양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고 생활 근거지도 같은 서울 북부로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빠른 시간 안에 만나자는 얘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너무 반가운 나머지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국교육신문이 아니었다면 오늘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