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시 수업이 끝난 뒤 교무실로 돌아오자 휴대폰에 반가운 문자메시지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수능 원서 때문에 오늘 찾아 뵙겠습니다.”
제자의 문자메시지를 읽으면서 새삼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2월 대학에 합격을 하고도 집안사정으로 대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려졌다. 졸업식 날 남몰래 눈시울을 붉히며 3년 동안 정들었던 교정을 떠나는 그 아이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이후로 제자와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나마 다른 아이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는 졸업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낮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독학으로 재수 준비를 한다고 하였다. 학창시절 워낙 성실하고 믿음이 가는 아이라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으로서 마지막까지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일까. 내 마음 한편에는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학교를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아이를 만난다는 기쁨에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찾아온다는 제자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할 수없이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모자를 눌러 쓴 누군가가 교무실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제자였다. 제자는 나를 보자 반가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선생님, 그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그래,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제자는 예전에 비해 더욱 성숙해 보였다. 학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한 탓인지 얼굴은 많이 그을려 있었다. 제자와 짧은 재회의 기쁨을 나눈 뒤 수능 원서를 작성해 주었다. 제자는 올해에는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못 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일하여 모아 둔 돈을 저축한 통장까지 보여주었다. 제자의 그런 모습이 대견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공부는 열심히 했니?” “예.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자신감이 있어 보이는 제자의 대답에 왠지 믿음이 갔다. 식사를 하러 가자는 나의 제안을 제자는 조심스레 거절하였다. 수능 원서 때문에 잠깐 시간을 할애하여 내려왔다며 자신의 현재 입장을 밝혔다. 할 수없이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하며 제자와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하는 제자를 교문까지 배웅해 주었다. 교문을 나서는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자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기도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제자와의 잠깐의 만남이 있어서인지 오후 내내 기분이 좋았다. 퇴근 무렵 책상을 정리하던 중 교무수첩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자가 몰래 두고 간 편지봉투였다. 봉투를 열자 제자가 자필로 쓴 편지 2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내용에서 제자는 지금까지 말로 표현하지 못한 사연을 허심탄회하게 적어 두었다. 그리고 타향 생활을 하는 가운데 힘이 들 때마다 담임인 나를 생각했다고 하였으며 그 어떤 미안함 때문에 연락을 할 수 없었다며 그간의 심경을 밝히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편지 끝에 쓴 문구 “못난 제자 OOO올림”은 마음을 아프게까지 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 제자를 못난 제자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자는 현재의 상황을 자신이 못난 탓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포기한 것이 결코 자신의 탓이 아닐진대 말이다.
제자의 편지를 읽고 난 뒤, 매년 합격을 하고도 등록금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려졌다. 아무쪼록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제자가 원하는 대학에 꼭 합격하여 환하게 미소짓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