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는 산업도시인 동시에 조상의 얼이 담긴 곳이 많은 유적도시이며 교육의 도시이기도 하다. 지난 99년 울산교육연수원에 근무한 것이 저에게는 교직생활 30년 중 가장 추억이 많이 담긴 해였다. 그 때 당시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러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울산교육연수원은 경남과 분리되기 전에는 학생들의 수련활동인 수련원이었지만 저가 교육연구사로 발령받은 당시에는 광역시로 승격된 이후라 학생수련원과 교원연수원으로 겸하여 운영하던 때였다.
그 때 저는 교수실에서 교원연수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학생수련에 관한 보조업무를 했다. 담임연구사가 계시지 않으면 대신 보조 담임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사물놀이지도에 대한 담당연구사님이 이동하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저가 어깨 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사물놀이 지도를 하기도 했다.
그 때 당시 생활근거지가 울산이 아니고 마산이었기 때문에 저 혼자서 객지생활을 하던 때였다. 그래서 연수원 내에 있는 숙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다른 분들은 두 명씩 배정이 되었지만 저는 객지생활을 한다고 원장님의 크신 배려로 혼자 조금만 숙소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숙소는 별도의 건물이 아니었고 학교건물을 수련원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숙소도 교실의 반 크기였다. 숙소 앞에는 가까이는 아주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으며 그 뒤로는 수많은 70-80m씩 자란 해송들을 비롯하여 온갖 나무들로 가득 찬 산이 보이는 곳이며, 뒤에는 넓고 푸른 동해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밤이 되면 성난 파도는 더욱 기세를 부리며 귀를 두드리고 있었고 때로는 200m쯤 떨어진 울기등대에서 간혹 들려오는 뱃고동과 같은 등대소리는 더욱 저를 움츠려들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연단과 단련의 장소임에 틀림없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바다의 파도소리는 때로는 두렵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주눅 들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자신을 날마다 되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낮이 되면 성난 파도는 고요해짐과 동시에 내 앞에는 연수원의 장관이 펼쳐진다. 찬란한 아침 햇살과 함께 연수원의 아름다운 모습은 저를 두려움에서 평안을 가져다주었고, 위축된 생활에서 다시 기지개를 펴게 하였다. 다시 새 힘과 용기를 얻게 하였고 큰 꿈과 비전을 품게 하기도 하였다.
언제 봐도 연수원의 뜰은 좋다. 하루하루가 다르다. 며칠 만 관심밖에 두면 몰라보게 달라진다. 며칠 만에 보게 되면 연수원의 뜰은 많이 변해 있다. 4월의 중순을 넘겨 정원을 보게 되면 화사하게 뽐내던 벚꽃과 자목련, 홍목련은 자취를 감추고 늦게 핀 벚나무 한 그루만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름다움을 오래 간직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빨리 피웠던 꽃들은 역시 빨리 지고 다른 나무들이 꽃을 피워 자랑하고 있을 땐 꽃을 피우지 못해 애태우기도 했지만 다 떨어지고 나서 피우게 되니 더 보기가 좋고 빛나보였다. 더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늦게 핀 벚꽃은 무슨 일에든지 조급증을 내며 설치는 저에게 위로와 평안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정원을 볼 때마다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다짐을 하기도 하며 감성을 키우기도 하였다. 시절마다 피는 정원의 꽃들은 시시때때로 다른 느낌을 주었다.
동백꽃은 생각보다 꽃이 오래가서 좋다. 아마 긴긴 겨울을 참고 견디어내었기 때문이 아닐까? 매서운 바다바람도 참고 혹한의 밤도 이겨내고, 눈바람 날리며 강풍 불어와도 쓰러지지 않은 덕택으로 송이송이 자줏빛, 분홍빛 오래 간직하는 것 아닌가? 벚꽃처럼, 목련꽃처럼 설치지 않고 얌전하게 차분히 때를 기다리더니 그들이 가고 있는데도 다 간데도 가지 않고 가만히 예쁜 꽃들을 피우고 있으니 장하기도 하다.
박테기는 오래도록 꽃망울을 머금고 준비하고 있더니 드디어 제 모습을 나타내는구나! 준비기간이 유달리 길어 보였으나 때가 되매 가지가지 송송 솟아나는 붉은 자태야말로 논개의 붉은 마음보다 더 붉다. 삼라만상이 그렇듯이 모든 꽃들도 때가 있는 법. 필 때가 있고 질 때가 있지 않은가! 제발 서두르지 말자. 자기의 때를 기다리자. 조급하지 말자. 박테기야말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나무가 아닌가?
자줏빛 라일락꽃도 아직 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라일락꽃은 필 때는 좋지만 질 때는 추해 보여 집 뒤뜰에 심는다고 하나 아직까지 라일락꽃의 인상은 그런 대로 괜찮다. 화단에 심겨진 1년초들도 아직까지 갖가지 그림을 내가며 피워있는 모습 아름답다. 사람들이 심어둔 1년초보다 더 예쁘고 귀여운 꽃들이 연수원의 정원에 많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옛 방어진중학교의 건물이 섰던 터에 노란색의 민들레가 여기저기 많이 피어 있었고, 이름 모를 자줏빛 꽃은 약하고 연해 보였지만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이 옮겨 심은 1년초보다 오히려 더 예쁘게 보이는 건 사람들의 손이 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꽃이기 때문이 아닐까?
언제 보아도 좋은 연수원의 정원이 내일은 무엇이 나를 매료할까? 하며 기대하게 된다. 모든 것은 아름다움의 기간이 짧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지만 이 정원의 아름다움은 조화 속에 이루어져 오래오래 계속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