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온종일 보슬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봄이 가까운 탓일까?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따스한 국물이 그리워진다. 특별히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삶은 달걀이나 계란탕이 종종 생각난다.
이름은 ㅇ주, 그 아이는 내가 교직에 처음 들어서면서 담임을 맡은 반의 아이 이름이다. 그는 파주시 교하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신도시 개발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몰라보게 변한 도시가 되었지만, 십칠 년 전만 해도 하루에 버스가 두 세대만 다닐 만큼 외진 곳이었다.
처음 맡은 반의 아이들이었기에, 나름대로 정을 듬뿍 주었다. 어느 때 보다도 교육자로서의 열정이 넘치던 때였다.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열악했다. 절반의 학생이 결손가정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부모님도 없이 고모님 댁이나 삼촌 댁에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있었다. 더욱이 취업이 우선적인 고려사항이었기에 대학 진학은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고 학업에 대한 열의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의 성적 향상보다는 출석부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근태상황에 각별한 노력이 필요했었다.
입학한 지 넉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ㅇ주가 갑자기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다. 그 전에도 결석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아무런 연락이 없이 결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집에 전화를 해도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ㅇ주를 아는 아이들과 함께 가정을 방문하기로 했다. 다행이 통학하는 학생들을 위한 시내버스가 있어서 금촌으로 서둘러 나갔다. ㅇ주네 집은 금촌 터미널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더 가야 하는 곳에 살고 있었다. 두 번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산이 없었다. 가방을 머리에 이고 양복바지의 끝단을 접고 걸어가야만 했다. 흙탕물로 범벅이 된 길이었다. 20여분을 걸었을까? 같은 반 아이들의 안내로 쉽게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옷은 젖어버렸고 으스스 몸이 추웠다. ㅇ주네 집에 도착하니 다행히 어머니가 계셨다. ㅇ주는 볼 수 없었다.
ㅇ주가 잦은 결석으로 수업 일수가 모자라면 졸업할 수 없음을 얘기했고, 아이가 돌아오면 학교에 꼭 데리고 오십사하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도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자식을 돌보는 고충을 말씀하시곤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곤 사십이 가까운 나이에 늦둥이로 낳은 막내아들이 철이 없다면서, 잘 부탁한다며 누누이 말씀하신다.
어머님은 서둘러 저녁을 준비하신다. 읍내로 나가는 차 시간이 아직 멀었으니 저녁을 꼭 들고 가라며 나를 붙잡는 것이었다. 따스한 정이 넘치는 촌로의 정성이었다. 어머니는 어느새 준비하셨는지, 씨암탉을 잡아서 상을 차려 오셨다. 그리곤 어려운 가정을 홀로 이끌다보니 농사일로 아이에게 따뜻한 정을 주지 못했다면서 자신이 죄인이라시면서 내게 각별한 부탁의 말을 여러 번 반복하셨다.
가정 방문 이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ㅇ주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소문에 인근 중학교 여학생과 함께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아이가 가출한 것이다. 그가 가출한 지 한달이 지난 여름방학 때였다.
어느 촌로가 집을 방문을 했다며 아내의 연락이 왔다. 그날도 비 오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달걀 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교하에서 내가 사는 월롱까지, 그것도 비 오는 날, 그것도 걸어서 우리 집까지 오셨다는 것이었다. 가출한 자식을 잘 부탁한다면서 글썽이던 촌로의 모습, 십 칠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하지만, 결국 그 아이는 학교를 중도에 그만 두고 말았다. 여러 곳을 수소문해서 그 아이를 찾아 설득했지만,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다고 했다. 홀로 독립해서 살고 싶다고 했다. 더욱이 중학교 여학생과 이미 사글셋방을 얻어 살고 있다고 했다. 어느새 아이도 가졌단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도무지 설득을 할 수가 없었다. 여자 아이의 부모님도 이미 허락했단다. 결국 여름방학이 끝나고 두 달을 더 그를 기다렸지만, 학교에 나타나질 않았다. 학교의 이미지도 있고, 학생들의 소문이 일파만파로 커져나가면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자퇴처리 되고 말았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후에 그를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퇴근하는 길이었다. 버스를 타고 차에 내려서 건널목 신호등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웬 트럭 한 대가 내 앞에 갑자기 섰다. 그리고는 수박 한 덩이를 불쑥 내미는 이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ㅇ주였다. 그리곤 달걀 한 판을 땅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시내에서 야채장사를 한다고 했다. 아이도 제법 커서 초등학교에 다닌단다. 지난 날, 학교를 그만 둔 일을 많이 후회한다고 했다. 아울러 자식을 위해서 매일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때 좀 더 그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하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설득했었더라면, 그런 아쉬움과 자괴감이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새 학기가 되면, 아이들과 첫 만남을 있을 때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얘기를 자주 하곤 한다. 암탉과 병아리가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만 아름다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함께하는 생활 속에서 서로를 돕고 배려하는 삶을 살자고 강조하곤 한다.
내가 달걀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때의 어머니의 정성을 잊지 않기 위함이고, 그 아이와 같은 무정란을 다시 낳지 않기 위한 마음에서다. 어린 생명을 사랑과 정성으로 품으려는 반성의 마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