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갑자기 낯선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놀라시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전혀 기억하시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저는 39년 전 1968년 8월 서울 종로 2가 EMI학원에서 신일선생의 `완전수학1`강의를 듣던 남학생입니다. 그때 교수님께서는 S여고 3학년 학생으로 금호동에 살고 계셨지요. 저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재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돈암동 고모님 댁에 의탁하여 지내고 있었습니다. 학원에 등록해서 수학을 공부하고 있던 중 한 단발머리 소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B교수님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학생으로 서울 여학생에 대해서는 항상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 언감생심 어떻게 말을 쉽게 걸어볼 수나 있었겠습니까? B교수님뿐만 아니라 다른 여학생들에 대해서도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가 한여름 밤이라 강의실 불빛으로 나방이가 날아들기도 했지요. 저는 가수 김상국의 불나비라는 노래를 떠올리며 그 나방이들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마음......”하는 노래 있지 않습니까. 한 여학생이 마음에 다가 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매료되었다고나 할까요. 물론 저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때 교수님은 S여고 교복을 입고 있었지요. S여고에 대한 학교이미지도 좋았고 그 학교의 교복이며 배지가 저에겐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교수님의 단발머리와 그 차가우리만치 이지적인 눈매는 지금까지도 저를 몽롱한 환상에 빠지게 하지만 말입니다.
그 후로 한 달의 강의가 다 지날 무렵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곧 종강을 하면 여학생을 볼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 때문이었지요. 어느 날 강의가 끝나고 각자 집으로 향할 무렵 학원 앞에서 제가 말을 붙여보았지요.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어색할 정도로 머뭇거리며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때 여학생의 대답은 단호했었습니다. "스케줄이 꽉 짜여 져 있어서 시간이 없어요?"였지요.
저는 쥐구멍이라도 찾을 듯 당혹해 하며 다른 쪽 골목을 통하여 집으로 왔습니다. 그 다음 날인가 저는 책을 한 권 사가지고 무작정 그 여학생 꽁무니를 따라갔습니다. 집이라도 알아놓을 심산이었지요. 또 선물도 꼭 주고 싶었습니다. 을지로에서 버스를 탄 그 여학생은 금호동 로터리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갔지요. 저는 저만치 거리를 두고 따라갔습니다. 집 근처에 왔을 때 준비했던 책을 건넸지요. 받지 않았습니다. "빨리 가세요. 오빠가 나올지 몰라요." 책은 받지 않고 당황스러워 하며 빨리 가라고만 서둘렀습니다.
그렇게 학원 강의는 끝나고 다시는 그 여학생을 볼 수 없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밤에 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금호동으로 가서 그 여학생이 들어갔던 집 창문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한번은 저녁 나절 집으로 찾아가 교수님의 어머니를 뵙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예닐곱 살 된 여자아이를 데리고 나오셨는데 그 아이가 무척 예뻤습니다. 저는 지금껏 그 어린이가 교수님의 막내 동생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조용히 타이르셨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기회가 있으니 지금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때라고 이르셨지요.
그 무렵 갑자기 예비고사 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예비고사도 끝나고 본고사 발표도 끝난 2월이었던가요. 다시 금호동으로 찾아갔습니다. 두 오빠들을 만났었지요, 어머니도 옆에 계셨습니다. 집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나지막한 별채가 있었는데 그 방에서 오빠는 제게 물었습니다. "경ㅇ이 어디가 좋은가요?" 오빠는 운동을 했는지 무척 강인해 보였습니다. 얼른 순진한 모습이 좋다고 말했지만 당황해서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경ㅇ이는 은ㅇ하고 은ㅇ네 고향 정읍에 갔다는 것입니다.
은ㅇ는 ㅇㅇㅇ 학생으로서 그 해 예비고사에서 여자 전국수석을 차지한 학생이었습니다. 교수님과는 S여고 동기동창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절친한 친구사이였나 봅니다. 그날은 그렇게 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름이 경ㅇ이라는 것을 그 날 처음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E대 가정관리학과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지요. 나는 내가 K대 국문과에 합격한 것을 말했지요.
입학식도 끝나고 3월 하순쯤 술을 한 잔 하고 금호동으로 찾아갔었습니다. 초저녁이었지요. 그날 집 뒤 교회 옆 골목길에서 오빠와 격투가 벌어졌지요. 제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습니다. 골목 모퉁이 구멍가게에 들어가 대충 피를 닦아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동생을 지극히 사랑하여 염려스러운 마음에 그랬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E대 앞 ㅇㅇ동 Y대에 다니는 친구의 하숙집에서 자고 이튿날 오후 E대 앞에서 기다렸지요. 그때 그 여학생이 학교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내심 반갑고 한편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그 여학생이 타는 차에 함께 올랐지요. 그 여학생은 동대문 근처에서 내려서는 신설동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나는 뒤를 따라갔지요. 신설동 로터리 다원제과 입구에서 우리는 오빠와 만났습니다. 여학생이 아마 각본을 짜고 연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걷는 도중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었는데 그때 오빠에게 전화를 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다원제과에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오빠가 술 한 잔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만나보고 싶어 했으면서도 왜 그 제의를 거절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전날 친구들과 과음을 한 탓인 것 같습니다. 의례적인 인사성 대화 몇 마디를 나누고 우리는 제과점을 나와 각각 다른 길로 헤어졌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해 내내 삼선개헌 반대 데모는 캠퍼스를 뜨겁게 달구었고...... 저는 일 년 만에 국문학을 접고 영문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제 나이 30대 중반이었습니다. 우연하게 월간지 여성동아를 펼쳤다가 거기서 B교수의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어린이 성교육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막연하게 그 여학생이 대학교수가 되었구나 하고 지내왔습니다. 서점엘 가면 관련분야 책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혹시 교수님의 저서가 있지 않을까 해서였지요. 그래 주ㅇㅇ교수와의 공저 하나를 찾아내 구입해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그 후 또 오랜 시간이 지나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고 저는 검색창에 교수님의 성함을 써넣고 검색을 해보았지요. 여러 가지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근황을 접하기도 하고 여러 편의 논문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최근엔 또 저서를 새로 내셨더군요.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요즘에도 오래 전의 작은 에피소드는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새롭기만 합니다. 지난 2005년에 수필집을 한권 출간했습니다. 그 책에 교수님과의 까마득한 옛날의 작은 에피소드를 글로 엮어 `교수가 된 여학생`이라는 제목으로 싣기도 했었지요. 93년도 7월 무렵엔 다음과 같이 써보기도 했습니다.
금호동연가
그 로터리에서 나지막한 언덕길을 걸어 꼬불꼬불 너의 집에 이르던 그길 길가에 초라하던 세탁소며 쌀가게 대폿집 다시 번잡한 시장모퉁이를 지나 너의 단층집 정원의 상록수들 그 나뭇가지 사이 창문의 불빛 아늑한 고전의 불빛 나는 몰라 내 젊은 날의 열정이 꿈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어설픈 생존의 아우성이었는지 나의 스무 살은 온통 열기에 타올라 너의 집 주변을 맴돌게 했다 불나비처럼 너는 또 어떤 우여곡절을 겪어 그 아늑한 고을을 떠났을 것이냐 네가 벌써 떠났을 그곳에 열아홉 살 단발머리 너의 눈빛은 곱고 내 스무 살 불같은 열정은 지금도 종종 불꽃이 일고 잿더미 사이로 장미 빛 불꽃이 일고
제가 감히 어떻게 이런 편지를 띄울 엄두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샘터사의 홍보 메일이 편지쓰기 이벤트를 알려왔기에 공적인 행사에 참여한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마음은 어리기만 하고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기도 하여 이렇게 이벤트의 일환으로 적어보았습니다. 너무 놀라시거나 당황해하지 마시고 천리 밖 먼 고장에 40년 전의 한 작은 인연을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하신다면 한없이 감사하게 여길 것입니다. 또 매우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대학과 군대를 마치고 계속 인천에서만 30년 가까이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하고 있습니다. 샘터사에서 계획한 이 이벤트에 참가해볼까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교수님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어떤 의구심이나 선입견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한번 듣고 싶다는 생각은 종종 하지만 그 기회가 오지 않는군요.
한번은 상경하여 동대문운동장 근처를 지나다가 갑자기 금호동엘 가보고 싶었습니다.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고나 할까요. 차를 몰고 금호동으로 향하여 교수님의 옛 집터로 가보았습니다. 차를 골목에 세워두고 이곳저곳 서성거리며 옛일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옛집은 간 곳 없고 병원 건물이 들어서 있더군요. 세월은 이렇게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며 흘러가는 것 같아 한참을 아쉬워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종종 교수님의 학문적인 글을 읽다가 지난해 8월에 불교여성개발원 홈페이지에 쓰신 `불교의 품속에서`를 읽었습니다. 모처럼 소회를 적은 수필 형식의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비로소 불교와 인연을 맺으신 경위를 알게 되었지요. 꾸준하게 학문의 길을 걸어오신 것 같아서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근래 보도에 따르면 또 사범교육대학장의 중책을 맡으셨더군요. 그저 멀리서 우연하게 접하는 기사일지라도 그저 어린애처럼 즐겁고 반갑기만 했습니다. 아무쪼록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후학들을 위해 더욱더 힘써 주시기를 바라며 외람되이 보내드린 글월을 마치려 합니다. 교수님 건강하시고 부처님의 품속에서 항상 행복하시기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