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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질박한 魚香이 ‘친구’처럼 묻어나는 대변항

- 멸치회가 익어가는 대변항의 갯냄새.

T.S 엘리엇은 4월은 잔인한 계절이라고 노래했지만, 기장군 대변항 4월은 멸치회가 고소하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멸치를 회로 먹는 다는 것이 다소 신기하게 느껴지겠지만 대변항에선 멸치를 분명히 회로 먹는다. 이렇게 회로 먹을 수 있는 이유는 흔히 볼 수 있는 잔멸치가 아니라 어른 손가락처럼 굵은 몸통을 가진 멸치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살집이 좀 있다 보니 회로 먹을 수도 있고 여느 생선처럼 구워 먹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멸치 회엔 서민의 향이 깊숙이 배어있다. 대변항은 전국 멸치 유자망 어선의 70%를 담당할 정도로 멸치가 풍성한 곳이다.

영화 "친구"를 보면 동수로 분한 장동건이 어느 방파제에 쭈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나온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부하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장동건은 아주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조오련과 거북이가 수영시합을 하면 누가 이기겠느냐는. 이 엉뚱한 질문은 영화의 도입부인 개구쟁이들의 수영 장면에서 이미 등장한 것이다. 생각해 보건대, 조오련과 바다거북은 준석(유오성)과 동수(장동건)를 상징하는 게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조오련이 분명 바다거북을 이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오련은 숨이 찰 것이며 점차 속도가 떨어질 것이다. 마침내 속도가 떨어진 조오련은 꾸준히, 쉴 새 없이 헤엄쳐온 바다거북에게 추월당하고 말 것이다. 동수는 준석을 그런 식으로 추월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의 경쟁 심리를 아주 우회적으로 표현한 이 장면은 바로 기장군 대변항의 동쪽 방파제와 그 바다에서 촬영된 것이다. 부산 출신인 곽경택 감독이 첫 장면으로 선택할 만큼 대변항은 아주 맛난 냄새가 나는 소박한 항구이다. 대변항은 영화 덕분에 잠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멸치회로 유명한 곳이었다. 해마다 4월이면 대변항에는 멸치의 향이 "친구"처럼 편안하게 피어오른다.

대변항의 아침은 밤새 해풍에 시달린 어선들이 붉은 석류 빛에 물든 바다를 휘적거리며 선착장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오징어잡이배의 수은등은 마지막 빛을 발하며 어느새 홍매화 색으로 변한 바다를 어루만진다. 수은등의 끈질긴 색에 취해 바다는 점차 은빛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항구의 아침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항구 전체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태양빛에 몸을 온전히 맡길 때쯤이면 선착장에는 아주 진기한 풍경이 벌어진다. 멸치잡이 배가 그물에 가득 담긴 생멸치를 와르르 갑판에 쏟아 붓고 나면 촘촘한 그물코에 멸치들이 다문다문 걸려 있다. 배에서 내린 어부들은 그물 한쪽 끝을 서로 당기면서 이 멸치들을 털어 내기 시작하는데 이게 바로 ‘멸치털이’라는 것이다. 어민들은 ‘멸치털이’를 하면서 ‘어라이 데야’라는 후렛가락을 빠른 박자로 읊조린다. 그 박자에 맞추어 그들의 힘센 팔뚝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은 생명과 약동의 기운을 절로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대변항은 출렁이는 생명의 언어로 가득 찬 곳이다.




참 재미있는 것은 멸치털이 하는 어민들의 옆에 바가지와 플라스틱 통을 든 채 몰려 있는 아낙네들의 모습이다. 그물코에 걸린 멸치는 다소 상품성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어민들은 그물 밑에 떨어진 멸치들은 내버려 둔 채 다시 배에 오른다. 그러면 멸치털이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아낙네들은 떨어진 멸치를 너나들이로 쓸어 담아 간다. 일종의 보리이삭줍기가 연상되는 참 소박한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삭줍기나 멸치 줍기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가진 자의 최소한의 온정이지 않을까? 어쩌면 그런 모습이나마 간직하였기에 이 땅의 사람들이 모진 목숨을 이어져 온 건지도 모르겠다.

멸치 회는 솔직히 말하자면 회 맛 자체로 본다면 일품은 아니다. 횟감용으로 쓰기에 멸치는 어딘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준다. 멸치도 일종의 등 푸른 생선인데 이 생선들은 성질이 급해 물위로 나오면 빨리 죽어 버리고 그때부터 부패하기 시작한다. 또한 실제 고기 자체가 별로 탄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멸치 회를 즐기는 이유는, 고기 자체의 육향보다는 멸치 회와 버무려서 나오는 야채와 양념의 향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명성만 듣고 군침을 흘리며 맛보러 왔다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탄력이라고는 전혀 없고 아이스크림처럼 금방 흐늘거리는 맛이다)아주 독특한 회를 맛보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면 된다. 흐늘거리는 멸치 회를 그래도 인내심 있게 씹다 보면(?) 담백한 향이 어느새 입안에 고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다. 다른 생선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으로 서너 명이서 푸짐하게 먹을 수 있으니 참 부담 없는 생선회라 할 만하다. 이렇듯 대변항의 멸치 회는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서민의 향을 안고 있다. 그리고 그 향은 언제나 푸근하다.

대변항의 또 다른 별미 중 하나는 고등어회와 갈치회인데, 역시 입안에 감도는 담백한 향을 즐길 수 있다. 해당화와 동백이 빨간 꽃봉오리를 처녀의 홍조처럼 살짝 피우기 시작하는 가을에 오면 멸치 회와 고등어회, 갈치 회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널따란 방파제에서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맑은 술과 민초의 향이 어우러진 멸치 회를 음미하는 것도 계곡의 푸른 물에서 시를 읊는 풍류만큼이나 멋진 일이 아닐런지......

대변항의 봄은 민초들의 언어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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