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7월 소설가 폴 오스터는 친구에게 1962산 타자기를 헐값에 샀습니다. 그때부터 쥐색 몸통의 수동타자기는 오스터가 두드리는 모든 단어들을 종이에 찍어나갔지요. 일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지만 고장 하나 없었다네요. 청소하려고 가게에 들고 간 횟수는 대통령 선거를 한 횟수보다도 적었고요.
워드프로세서나 컴퓨터가 나왔을 땐 친구들이 손가락 한번 잘못 눌러 원고를 몽땅 날려버린 끔찍한 사연을 들려주었답니다. 기계치인 오스터는 당연히 타자기를 고수했지요. 80년대가 가고, 90년대를 지나면서 친구들은 그를 고집쟁이 늙은 염소라고 놀린답니다.
이제 타자기는 절멸 위기에 처한 희귀종이며, 20세기의 마지막 인공기념물이 되었으니까요. 도구였을 뿐인 녀석에게 이젠 각별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녀석의 종말을 감지한 오스터는 수소문 끝에 타자기 리본 50개를 구입했습니다. 마지막이란 생각에 쓰기도 조심스러워 잉크가 다 닳아 종이에 글자가 잘 안보일 때까지 타이핑을 한답니다.
타자기를 사랑한 작가는 많지만 오스터 만한 매니아도 드물지 않을까요. '빵 굽는 타자기'에 이어 '나의 타자기 이야기'까지, 타자기를 소재로 한 책을 두 권이나 내었으니 말입니다. 타자기는 어디를 가든 오스터를 따라 다녔습니다.
수 백 자루 연필과 펜을 잃어버리고, 또 버렸지만, 타자기는 여전히 그의 곁에 건재합니다. 함께 지낸 9400 날을 회상하는 순간조차 타지기는 오스터 앞에 앉아 있으니까요. 타자기에 손을 얹어 글자를 찍을 때, 녀석은 그가 글 쓰는 걸 바라봅니다. 그 속에서 지나온 세월과 흘러갈 시간이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낡았어도 버리지 못하는, 당신과 기억을 공유하는 물건 하나쯤 가지고 계시겠지요. 나를 속속들이 알고있는 오래된 그 무엇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또 한 해를 세월 속에 묻어야 하기 때문인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