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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오해

“따르르릉~~”
“안녕하세요? ○○○입니다. 아시겠어요?”

갑자기 나의 목소리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떨려왔다. 이게 얼마 만인가? 대학 때 몇 번 만나다가 멀어진 지 삼십 년이 지나 그의 이름 석 자도 지워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늘 도서관에 공부하러 갔다. 우리 동네에는 나처럼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예비고사란 것을 치르고 발표를 며칠 앞 둔 어느 날 그 남자애가 나에게 슬그머니 쪽지를 내밀었다.

“점심시간에 도서관 입구에 잠깐 나오세요”

나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그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우리는 아침에 함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저녁에 만나서 집으로 가곤 했다. 그 때만 하여도 남녀가 분리된 도서관이어서 나는 자리에 앉아 내내 가슴을 설레며 그를 생각하면서 시계만 들여다보곤 하였다.

입시가 끝나고 우린 사진을 교환하면서 평생 간직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누나와 형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인사도 시켰다. 나도 언니에게 사진을 보여 주면서 착하고 모범생인 그의 자랑도 조금씩 늘어놓곤 했다. 언니는 피식 웃으며 ‘잘 해 보라’고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어떤 방법으로 만나서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냥 즐거웠고 많이 웃었다는 것, 분식집과 음악 감상실도 갔었고 단발머리에서 생전 처음 커트를 치고 어색해 했던 기억들...

갓 스무 살의 우린 그렇게 하면서 각자 대학에 들어갔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그 시절에는 집으로 전화를 했었는데 대부분 안방에 전화기가 있었다. 전화를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이 되던 때에 새내기 1학년들이 소식을 통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그의 전화가 와서는 “듣기만 해, 내일 네 시에 시민회관 앞으로 나와라”는 말을 하고는 부리나케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그는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날을 정해 두고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슨 계모임도 아니고 정한 날에 만나자니...’ 하는 듯한 나의 말에 머쓱했던지 그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사실 입학하기 전에는 시간도 많았고 할 일도 없어서인지 무척 자주 만났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그냥 만나면 될 것이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는 생각과 그리고 솔직히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만난다는 것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서인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었다. 그 때 그의 말대로 했었더라면...

그렇게 몇 번을 만나다가 미팅이다, 서클활동이다 하는 대학 생활에 젖어들면서 우리의 만남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각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뚜렷한 감정 표현도 없이 미지근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나는 졸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소식이 끊겼던 것이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그를 만나러 갔었다. 만나면 어쩔 것인가? 만나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머리가 가슴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는 내가 살아 온 이야기를 듣고 ‘잘 살고 있구나’ 하면서 자기의 얘기도 해 주었다. 나는 한 살 위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는 부인이 두 살 아래이고 아들 하나, 딸 하나라고 했다. 그는 서른에, 나는 스물여덟에 결혼을 했고 맏이가 우리 아이보다 두 살 적었다.

평소 직장일로 무척 바빴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대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 자부하였는데 잦은 야근 탓으로 가끔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때는 도대체 여자는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단다. 내가 생각해도 그는 성실하고 순수한 사람인데 아무리 부부라도 마음까지 다스릴 수 없으니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듯 싶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남남이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되었다. 우스운 것은 각자가 채였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그냥 ‘날 잊었나 보다’라고 생각했었고 그는 내 생각이 날 때마다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 ‘왜 연락이 안 올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우리 사귀자’ 로 시작해서 쿨하게 헤어지는 남녀를 보면 그 때의 우리는 참으로 바보스러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전화를 안 했냐고 뒤늦게나마 따져 보니 오히려 나더러 연락 없었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닌가? 난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못했다고 했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말 그대로 싱거운 옛날 이야기였다.

한참 동안 지난 추억을 더듬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것은 마치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것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은 이것으로 다함을 슬퍼하며 물처럼 담담한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

철없던 시절, 모든 것이 서툴었던 우린 좋으면서 손 한 번 못 잡고 억울하게 헤어졌었다. 만약 나의 청춘에 휴대전화가 있었더라면 이러한 오해는 없었을 것이며 어쩌면 나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첫사랑은 보란 듯이 이루어져 자랑스런 휴대전화의 수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야속한 휴대전화여~ 나의 운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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